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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토)

[필동정담] 日 출판사의 '토지' 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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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윤곽이 부서진 올여름 어느 한낮부터 박경리의 '토지'를 읽기 시작했다. 이제야 읽는 사실이 부끄러워도 독파 목표일을 정하진 않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파별천리 심정으로 읽었다. 1897년 한가위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를 다룬 대서사인데도 읽는 이의 호흡을 짧게 만들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이 넘쳐났다.

조선은 이미 기울었고 신분제도 허울뿐인데 경남 하동 평사리의 최참판댁과 향반, 노비, 소작인들은 주종 관계로 얽혀 있다. 바로 땅 때문이다. 땅을 가진 참판댁은 그 사실만으로 마나님이고 소작인들은 땅을 부쳐 먹어야만 소유주에게 떼주고 남은 곡식을 얻어 산다. 그때나 지금이나 땅은 인간의 경제적 욕망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내는 대상인지도 모르겠다.

이 뜨거운 명제를 대략 600명의 등장인물로 그려낸 박경리는 자신의 호흡만큼은 길게 가져갔다.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간 '토지'를 썼다. 이 기간 외부와의 접촉은 아예 끊다시피 했다. 저자는 흙으로 돌아갔지만 '토지'는 올해 완간 30주년을 맞았다. 이달 초 정부의 세종문화상 수상자 중 한 팀이 '토지' 20권을 일본어로 번역해 내놓은 현지 구온출판사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굴곡진 현대사를 주무대로 삼은 소설이 일본에서 완역됐다는 사실, 그 일본 출판사에 우리의 세종문화상을 수여한 것이다. 문학사적으로도 의미 있지만 국제 교류 측면에서도 각별하게 다가온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여파가 꽤 오래갈 것 같다. 문단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수상 뒤엔 번역에 공을 들인 영국인 데버라 스미스가 있다. 그렇다고 저자가 생존한 다른 수작들을 더 열심히 번역 출간해 또 다른 노벨상을 노리자는 얘기는 아니다. 노벨상은 결과일 뿐 결코 목표라고 할 수 없다.

한강의 수상은 우리 현대문학사 거장들이 다져둔 탄탄한 땅 위에 피어난 꽃이다. '토지'처럼 이미 명작 고전이 돼버린 작품들이 꾸준히 번역돼 국경을 넘어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다. 우리의 문학 토양이 이렇게 비옥해지고 있다.

[서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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