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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목)

“학대 당한 건 네 잘못이 아냐”...소년범과 ‘판밥’ 먹는 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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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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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재판장이 자신이 유죄 판결을 내린 피고인들과 선고 후 얼굴 맞대고 밥 먹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만약 피고인이 미성년자라면, 유죄 판결 대신 보호 처분을 받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가정법원 판사들은 범죄가 인정돼 보호 처분을 내린 소년범들과 꼭 점심을 함께 먹는다. 민간 보호∙복지시설에 6개월 이상 입소하는 ‘6호 처분’을 받은 청소년들과 식사하며 면담하는 업무 관행에 따른 것이다. 판사들에게는 ‘퇴소 전 면담’이라는 업무지만, 소년범들 사이에선 판사와 밥을 먹는다고 해서 ‘판밥’이라고 불린다.

소년법상 가능한 10가지 보호 처분 중 6호는 소년원에 갈 정도는 아니지만, 풀어주면 부모의 방치나 주변 영향으로 다시 비행을 저지를 우려가 높은 경우 내려진다. 일상과 범죄의 경계선에 서 있는 아이들이다. ‘판밥’은 이 경계에서 다시 우범지대로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판사들의 노력이다.

지난 4일 점심 서울 양재동의 한 고깃집에서도 ‘판밥’ 모임이 있었다. 서울가정법원 소년부 판사 6명과 소년범 20여 명이 삼삼오오 모였다. 6호 처분으로 시설에 간 남자아이들이 퇴소를 앞두고 판사를 보러 온 것이다. 테이블마다 판사 1명, 소년범 2~3명이 자리했다. 김모 판사의 앞에는 18살 동갑내기 이지훈(가명)군, 박민기(가명)군이 앉았다. 두 청소년은 각각 올해 5~6월 김 판사에게 재판을 받고 다른 시설에 입소했다. 법대 위에서 본 판사를 다시 만난 사춘기 소년범들의 앳된 얼굴이 불판 앞에서 번들거렸다.

“아침에 잘 일어나서 제때 밥 먹고 햇빛 쐬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잘 지키고 있니.” 숟가락을 뜨자마자 김 판사는 부모처럼 잔소리를 했다. 눈치를 보던 지훈은 “잘 먹어서 20㎏이 쪘어요. 시설 선생님들이 시켜서 회장을 맡고 있고요”라며 자랑했다. 민기는 “전에 다니던 대안학교에서는 툭하면 쌤들에게 욕설을 들었는데, 여기선 잘못해도 욕은 안 해서 좋아요”라며 웃었다. 시설에서의 규칙적 생활과 영양가 있는 식사는 청소년들을 ‘벌크업’ 시킨다. 여기저기서 “재판 때보다 뽀얗게 살이 올랐네” “길에서 보면 못 알아보겠다”는 판사들의 너스레가 들렸다.

불우한 가정 환경, 학대, 왕따 등은 여러 소년범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기억이다. 이혼 가정 출신의 지훈은 방황하다가 자살 시도를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맞고 자란 민기는 사춘기 때 반항심이 폭발해 비행을 저질렀다. 아픈 상처 때문에 다시 비행의 굴레에 빠지기도 한다. 재판을 하며 속 사정을 아는 판사들은 매달 시설에서 보내오는 보고서를 보고 아이들의 상태를 관찰한다. 김 판사는 지훈에게 “(자살 등) 잘못된 생각이 들면 언제든 말하라”고 당부했고, 민기에겐 “학대는 네 잘못이 아니다”라며 위로했다.

“동네 아는 애들이랑 지내면 또 사고 칠 거 같아서, 아무도 모르는 강원도에 가서 고깃집에 취업할까 해요. 카카오(뱅크)에서 ‘청년 대출’ 받아 보증금 마련하려고요.” 민기의 계획을 들은 김 판사는 “친형과 논의는 해봤니” “다른 대출 방법은 없을지 시설 통해 알아보렴” 하며 걱정스레 조언했다. 판사들에겐 아이들의 퇴소 후가 더 걱정이다. 시설에서 나와서 학교나 사회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 재범 위험성이 높아진다.

소년전문법관 김형률 부장판사도 건너편 테이블에서 부모와의 관계, 자립 계획 등을 캐묻고 있었다. 김 부장판사는 “면담을 하다 보면 제 직업이 판사가 아니라 담임 선생님 같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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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정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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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다 먹어갈 때쯤 10대들의 관심사인 소소한 연애 상담도 이뤄졌다. 이성 문제는 비행의 주요 원인 중 하나라, 소년범들에 대한 법원 기록에는 이성관계 등이 모두 적혀있다. 김 판사가 “재판 때 만나던 여자친구랑 어떻게 됐어”라고 묻자, 지훈은 부끄러운 듯 “바람 나서 헤어졌어요”라고 답했다. 김 판사는 “연애는 많이 해보는 게 좋아. 너무 여친한테 퍼주지 말고”라고 했다.

‘소년범에게 애정과 관심을 주면 다시 비행하지 않을 수 있다.’ 많은 소년부 판사들이 갖는 신념 또는 희망이다. 김봉남 판사는 이날 퇴소하는 아이에게 “네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으니 중간중간 전화할 거야. 잘 받아야 한다”며 애정 어린 협박을 했다. 그는 “퇴소해도 판사가 ‘너를 보고 있다’고 경각심을 주는 거죠.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라 이런 관심만으로도 크게 개선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날 ‘판밥’은 한 시간 반 만에 끝났다. 시설 복귀가 아쉬운지 몇몇은 판사에게 “편지를 쓰겠다” “명함을 달라”고 했다. 판사들은 이번 주부터 시설을 찾아 소년범들을 다시 만나고 있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6호 처분을 받은 소년은 2018년 1266명에서 작년 1661명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방극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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