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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목)

잘 먹고 잘살던 윤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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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나는 역사다] 윤덕영 (1873~1940)



명문가의 자손이었다. 할아버지 윤용선은 보수파 정치인, 고종 임금의 권력 강화를 위해 활약했다. 손자 윤덕영은 빠르게 출세. 서른도 되기 전에 경기도관찰사며 황해도관찰사며 굵직굵직한 자리를 두루 거쳤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터졌다. 1905년에는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갔다(을사늑약). 세상이 뒤집히는 중에도 승승장구했다. 윤덕영의 동생이 윤택영이고, 고종의 아들이 훗날의 순종이다. 1907년 1월에 윤택영의 딸이 고종의 아들과 결혼했다. 황제와 사돈을 맺은 셈. 7월, 일본이 고종을 물러나게 했고, 조카사위 순종이 임금이 됐다.



권력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윤덕영은 ‘새로운 세상’에 빠르게 적응했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쏘아 죽이자, ‘이토를 애도하는’ 추도회를 열었다.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할 때도(경술국치) 윤덕영이 앞장섰다. 조카딸 순정효황후가 임금의 옥새를 숨기고 내주지 않으려고 했으나 윤덕영이 윽박질러 옥새를 빼앗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야기의 참, 거짓은 모를 일이나, 순종을 ‘설득’하는 역할을 윤덕영이 맡았던 듯.



국권을 빼앗길 때 앞장선 대가로 윤덕영 개인이 받은 것은 부와 명예였다. 윤덕영은 귀족이 됐다. 일본으로부터 자작 칭호를 받았다. 윤덕영은 뒤통수가 짱구였는데, 사람들이 흉을 보며 ‘대갈대감’이라고 불렀다. 윤덕영은 일본 정부로부터 돈도 많이 받았다. 그 돈으로 지금 종로구 일대의 땅을 사들였다. 호화 주택 ‘벽수산장’을 짓기 시작했다.



1917년에 순종이 일본을 찾아가 일본 임금을 ‘알현’했다. 고종이 반대하자 윤덕영이 들볶아 일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1919년에 고종이 죽었을 때는 윤덕영이 독살에 가담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1935년에 벽수산장이 완공되었지만 정작 윤덕영 자신은 다른 집에 따로 살았다고 한다. 비난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리라. 1940년 10월18일에 죽었다. 나중에 윤덕영의 재산은 몰수되는데, 자손들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재산 반환 소송을 낸 일이 있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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