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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이제야 한강을 처음 읽는 사람…기대 그리고 걱정 [노원명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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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5·18을 다룬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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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 작가 한강의 아버지이자 본인도 소설가인 한승원씨가 지난 11일 언론 인터뷰에서 “(딸이)‘러시아,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모든 죽음이 실려 나가는데 무슨 잔치를 하고 기자회견을 할 것이냐’며 기자회견을 안 할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 전언은 한승원씨의 창작 혹은 과장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나 같았으면 당장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왜 주책없이 쓸데없는 말씀을 하세요”하고 타박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강씨는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자식이 노벨상을 탔는데 냉정할 아버지가 어디 있나. 더구나 과장과 창작은 소설가에게 흉이라고도 할 수 없다. 만약 한강이 실제 그렇게 말했고 그런 차원에서 기자회견을 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 범인류애적 감수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노라며 범생물학적 감수성을 보였던 그의 대학 선배 윤동주가 생각난다. 노벨 문학상 선정위원회는 작가의 품성도 고려하는가.

그다지 겸손하게 들리지 않는 부친의 ‘무슨 잔치’ 발언을 빼면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반갑고 기쁘다. 한국인의 맹렬한 인정 욕망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중요한 타이틀을 다 수집해서 그에 K타이틀을 달아 보관하는 일종의 수집벽증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갈망이 충족되지 못할 때 마다 공동체가 내뱉는 탄식과 신음은 참으로 요란했다. 그중에서도 값비싼 ‘잇템’이었던 노벨 문학상을 거두었으니 그만큼 한국인은 편안해질 수 있다. 황금종려상, 아카데미상은 이미 창고에 보관돼 있다. 우리는 더 이상 그에 대해 갈증을 느끼지 않는다.

아쉽게도 한강의 문학적 성취를 기뻐할 수는 없다. 민망하게도 나는 그의 글을 한 줄도 읽은 적이 없다. 한권이 아니라 한 줄이다. 그것이 무슨 죄는 아니지만, 그리고 지금까지는 아무 부담 없이 살아왔지만 그녀가 노벨상 작가가 된 지금은 ‘문학적 문맹’이라는 비난이 두려워진다. 내 또래 중에서는 서정주나 김수영의 시를 한 줄도 읽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거의 없는데 한강이 그들의 명성을 압도하게 된 지금은 ‘한강도 읽지 않은 상무식꾼’이 될 판이다.

지금 내 책꽂이에는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 1-2’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다. 누가 선물로 보내온 것인데 내가 저 책의 먼지를 털어내고 읽을 날이 과연 올까 싶다. 그것은 보나 마나 읽을만한 책이겠지만 나는 작가가 펼쳐 보이는 세계관에 마음이 동할 때만 읽는 편이어서 새로운 작가로 넘어가는 일이 좀체 없다. 모든 작가는 독자에게 펼쳐 보이고 싶은 고유의 세계관이 있고 우연히 접하게 된 그 세계가 너무 매혹적이어서 그의 다른 작품까지 보게 되는 작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가령 최근 노벨상 수상 작가 중에서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대부분 읽었는데 그가 창조한 세계는 카프카만큼이나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윌리엄 포크너, 허먼 멜빌, 조지 오웰, 밀란 쿤데라, 무라카미 하루키, 조지프 콘래드, 코맥 매카시, 레이먼드 카버, 가브리엘 마르케스, 니코스 카잔차키스, 발자크, 존 F 피츠제럴드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 보인다. 뻔하지 않은 글을 쓰는 작가들. 그러면서도 일관된 세계관이 있는 작가들.

나는 한강의 작품은 읽지 않고 그를 논한 기사만 간혹 읽었다. 기사에 따르면 한강의 글쓰기에서 큰 기둥 중 하나가 ‘광주’와 ‘5·18’이라고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게 불편할듯하여 그녀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 그녀는 내 또래 중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다. 나는 내 또래가 광주와 5·18을 주로 어떻게 다루는지, 한국 문화 지형에서 그게 상업적으로 성공하려면 어떤 방향성을 취해야 하는지 안다. 그리고 도식화된 그 성공 방정식, 그들이 풀어내는 천편일률 세계관에 신물이 난 지 오래다. 그래서 또래가 만든 5·18 영화를 보지 않는다. 소설도 읽지 않는다. 그들이 펼쳐 보이는 세계에는 참신함, 더 중요하게는 성실함과 진지함이 결여돼 있다. 나이가 들어도 20대에 박제된 듯한 분노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한강은 다를까. 노벨상을 받을 정도면 어쩌면 다를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된다.

내가 즐겨 읽는 작가 중에 조지 오웰과 밀란 쿤데라, 특히 오웰이 정치적인 글을 많이 썼다. 그들의 정치적 글쓰기는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래전, 먼 나라 이야기여서이기도 하겠지만 글쓴이의 ‘자격’ 문제이기도 하다. 오웰은 에세이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스페인내전에서의 잔학행위에 대하여 내가 가진 직접적인 증거는 별로 없다. 내가 아는 것은 공화파가 저지른 잔학행위가 좀 있는가 하면, 파시스트가 저지른 건 훨씬 많다는 점이다. 그런데 당시에도 그랬고, 그 이후로도 줄곧 인상적이었던 것은, 잔학행위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순전히 정치적인 편향에 따라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증거 조사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적의 잔학행위는 믿으면서 자기편의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가에 대해 목숨을 걸고 탐구했던 오웰이라면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그가 스페인내전 참전 경험을 토대로 쓴 ‘카탈로니아 찬가’는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글이지만 정치적 당파성(오웰은 한 당파에 소속돼 싸웠지만)에서 한걸음 물러선 초연함으로 쓴 글이다. 그것은 정치 팸플릿이 아니라 문학이다. 오웰은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나는 왜 쓰는가’)고 말했다. 그는 아마도 역사상 정치적 글쓰기로 가장 높은 경지의 예술에 도달한 인물일 것이다. 나는 그 비결이 지적 성실함과 사실을 대하는 겸허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13세에 부친이 준 사진첩을 보고 광주와 5·18에 대해 눈뜨게 되었다는 한강의 기사를 접하며 나는 좀 착잡해졌다. 문학은 경험하지 않은 것, 상상만으로도 완결에 이를 수 있고 기본적으로 허구로 빚는 보석이지만 그 허구를 진실 이상으로 진실되게 정제하는 작가들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주로 그런 작가들을 읽어왔다. 지금에서야 한강을 처음 읽으려니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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