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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도 못나온 재단사가 대통령으로…'영웅'에서 탄핵 위기까지[대통령의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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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17대 대통령 '앤드루 존슨'

[편집자주] 대통령의 '전직'은 중요합니다. 그들의 정치 성향과 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후보를 소개할 때 그들의 전직을 내세우는 이유입니다.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은 '검사' 해리스와 '범죄자' 트럼프라는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공화당은 트럼프를 '성공한 사업가'로, 해리스를 '존재감 없는 부통령'으로 그립니다. 두 후보의 전직은 미국의 미래에 어떤 결과로 나타날까요. 대통령의 전직이 미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앞선 미국 대통령들의 삶을 통해 돌아봅니다.

머니투데이

미국 17대 대통령(1865년 4월~1869년 3월) 앤드루 존슨 /사진=백악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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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쟁이 출신 주제에!" "대통령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다니!"

미국 17대 대통령(1865년 4월~1869년 3월) 앤드루 존슨은 정치 생활 내내 비난과 조롱에 부딪혔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채 생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1808년 노스캐롤라이나 롤리에서 출생한 그는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3세에 양복점에 들어가 재단 기술을 배웠다.

테네시 그린빌에 자신의 양복점을 연 존슨은 18세에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딸 엘리자 맥커들과 결혼했다. 교육을 받지 못해 글을 읽고 쓰지 못하던 그는 아내에게 글자를 배웠다. 책을 좋아한 그는 유명한 연설가를 다룬 책을 읽다가 정치적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양복점 고객들과 사회 문제를 두고 토론을 즐겼으며 지역 대학에서 지식인들과의 토론에도 참여했다.

존슨의 재단 사업은 결혼 초기부터 번창했다. 근면 성실한 재단사였던 그는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가졌다. 훗날 시의회 의원으로서 연설하던 중 군중 속 누군가가 "양복쟁이 주제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는 "나는 재단사였다는 사실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며 "왜냐하면 그 일을 할 때도 나는 1등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손님과의 약속을 지켰고 내가 만든 옷은 언제나 최고였다"고 말했다.

존슨의 재봉사로서 경험은 그가 근면과 자립의 가치를 중시하고 노동자의 고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아가 노동자와 서민층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가 됐다. 그는 1829년 그린빌 시의회 선거에서 기계공 후보단을 조직하는 일을 돕다가 시의원으로 선출됐다.

정치에 입문한 존슨은 탁월한 대중연설가의 면모를 발휘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린 카운티 구청장, 그린빌 시장, 테네시주 하원의원, 테네시주지사, 연방 상원의원을 거치면서 점차 이름을 알렸다. 1840~50년대 하원과 상원 의원 시절 그는 빈곤층에게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지사 시절에는 공립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육 제도를 확립하고자 노력했다. 어린 시절 겪은 극심한 빈곤과 그로 인한 교육의 부재에서 비롯된 정책들이었다.

존슨이 상원의원이던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선에서 승리하자 노예제 폐지를 반대하는 남부 7개 주가 미국 연방에서 이탈했다. 존슨의 출신주인 노스캐롤라이나와 테네시도 연방을 탈퇴했지만 존슨은 연방을 떠나지 않았다. 노예제 폐지에 찬성해서는 아니었다. 살면서 최소 10명의 노예를 소유했던 그는 노예제 유지를 위해 연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남북전쟁 시기 상원에 남은 유일한 남부 출신 의원이었던 그는 북부에서 영웅이 됐다. 하지만 남부에서는 배신자로 비쳤다. 이 일은 훗날 그가 겪은 정치적 기회와 위기의 계기가 됐다.

그의 용기와 충성에 깊은 인상을 받은 링컨은 존슨을 테네시 군정 주지사로 임명했다. 존슨은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직위를 지켰다. 1864년 공화당 소속 링컨은 재선에 나서며 민주당 소속 존슨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전쟁으로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고 민주당 내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이는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의 정당이 다른 유일한 사례로 남았다. 링컨은 재선에 성공했지만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한 달여 만에 남부 지지자인 배우에게 암살당했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부통령 존슨은 전후 남부 재건에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남부의 전쟁 관련자들을 사면하는 등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흑인 인권 보호에는 소극적이었다. 1866년 의회가 흑인에게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고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존슨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남부에 편파적인 그의 재건 방식은 훗날 흑인 인권을 100년 뒤로 미뤘다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존슨의 행보는 공화당과 늘 갈등을 빚었다. 민주당 내에서도 그에게 사면받은 남부 세력을 제외하면 지지율은 높지 않았다. 그 와중에 존슨이 공화당 급진파 소속인 전쟁 장관을 해임한 일을 계기로 하원에서 탄핵안을 제출했다. 찬성 126표 반대 47표로 탄핵 소추가 가결됐다. 1868년 봄 상원에서 탄핵안 심의가 진행됐고 존슨은 1표 차로 간신히 대통령직을 지킬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민주당 경선에서 패배해 일찌감치 재선에 실패했다. 1875년 테네시 상원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지만 몇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이영민 기자 letswi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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