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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토)

“벼농사도 자식 농사도 기다릴 줄 알아야… 들녘이 내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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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성윤 기자의 공복]

발아현미 개발 등 업적으로 一家賞

‘농부 과학자’ 이동현 미실란 대표

가을걷이를 앞둔 들녘에서 ‘농부 과학자’를 만났다. 지난달 제34회 일가상(一家賞·농업부문)을 받은 이동현(55)씨. 일본 규슈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 가방 끈 긴 농부는 2005년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을 설립했다. 국내 최초로 유기농 발아현미를 개발해 판매했고 연구한 품종만 1000여 개에 이른다.

이동현 미실란 대표는 친환경 생태 농업으로 벼를 재배해 유기농 발아현미를 만든다. 농촌과 도시가 환경과 먹거리에 대한 가치를 공유하는 다양한 일을 해 왔다. 폐교를 고쳐 차린 ‘밥 카페 반하다’에서는 그가 “짝꿍”이라 부르는 아내 남근숙씨가 발아현미와 지역 농산물로 건강 밥상을 내고, 생태 책방 ‘들녘의 마음’도 운영한다. 미실란은 매년 2만여 명이 방문해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는 명소. 젊은이들이 일하고 싶어 찾아오는 농업 성공 모델로 성장했다.

지난달 19일 전남 곡성.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 아래 누렇게 익은 벼가 바람에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아름답지요? 도시의 아름다움은 돈을 주고 사야 하는데, 농촌의 아름다움은 공짜로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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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일가상 수상 후 김현(왼쪽) 일가재단 이사장과 이동현 대표. 일가상은 가나안농군하교 창설자인 일가 김용기(1909~1988)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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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유망한 과학자, 농부 되다

과학자가 농부가 된 것은 고귀한 신념이나 숭고한 철학 때문이 아니었다. 국내 학계의 높은 벽과 가난한 집안 사정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내린 절박한 선택이었다.

-칠 남매 중 막내라고 들었습니다.

“태어나 보니 아버지가 기가 찰 정도로 나이가 많으셨어요(웃음). 69세에 저를 낳았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49세였고요.”

-부친이 유학자로 평생 책만 보셨다면서요.

“전남 고흥이 고향인데 군수가 부임하면 인사 올 정도로 존경받는 분이셨어요. 하지만 집안 살림을 돌보질 않으셨죠. 생활력 강한 어머니가 자식들을 다 키웠어요.”

-순천대에 진학한 것도 가정 형편 때문이었나요.

“집에서 제일 가까워 버스로 통학할 수 있는 대학이었어요. 큰형님이 어머니와 의논해서 첫 등록금만 대주겠다고 하셨지요.”

-농생물학을 전공한 이유는 뭔가요.

“원래 생물을 좋아했어요. 농업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미생물·곤충학 등을 배우는 농생물학과가 뭐랄까 풍요로워 보였습니다.”

-서울대 석사를 거쳐 일본에선 미생물로 박사 학위를 받았군요.

“대학원에서 쥐를 많이 죽였어요. 독소 미생물을 배양해 쥐한테 먹이고 죽으면 해부를 했습니다. 독소가 어느 장기에 문제를 일으켰는지 확인했지요. 군복무 후 생명에 대한 고민이 생겨 휴학을 하고 고향에 내려갔어요. 마침 규슈대 연구원들이 순천대를 방문해 ‘인재를 소개해달라’고 했고, 그렇게 일본 문부성 초청 장학생으로 박사를 하러 갔죠.”

그는 미생물을 이용한 농작물 병해충 방제 분야에서 전도유망한 과학자가 됐다. 2003년 규슈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을 때 이미 논문 7편이 국제과학논문색인(SCI)에 올랐다.

-박사를 마치자마자 귀국했는데.

“지도교수님은 ‘일본에서 연구를 계속하면 좋겠다. 아니면 미국이나 영국에서 포스닥(박사후과정)을 마치라’며 간곡하게 귀국을 말렸어요. 하지만 빨리 한국에 정착해 교수도 되고 가정을 안정시키겠다는 마음이 앞섰어요. 휴학하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결혼해서 아이가 둘이나 있었거든요.”

-결국 교수는 되지 못했습니다.

“지원한 두 군데 다 떨어졌어요. 제가 너무 쉽게 생각한 거예요. SCI 논문 편수로는 1등이라 당연히 될 줄 알았는데 왜 불합격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실적 평가는 100점이지만, 교수들과 관계를 잘 맺어야 하고 학교 당국에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관행에 대해 나중에 들었어요.”

-미생물로 병해충을 방제하는 신약을 만드는 회사(픽슨바이오)를 창업했습니다.

“그 분야에 한국에서 나만큼 실력 있는 사람은 없다는 자만심이 있었어요. 특허를 냈고 농약까지 개발했어요. 그런데 잘 만드는 것과 잘 파는 건 전혀 다른 세계더군요. 아무도 만나주질 않았어요. 대기업 한 군데를 겨우 만났는데, 너무 헐값을 요구하더라고요. 특허와 균주도 다 넘기라면서. ‘미생물로 사업하긴 어렵겠구나’ 깨닫고 접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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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란에서 만드는 유기농 발아오색미.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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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어머니 위해 시작한 발아현미

발아는 씨앗에서 싹이 트는 것이다. 이 대표는 인공 발아에 대해 “신을 대신하여 잠든 씨앗을 깨워, 씨앗이 스스로 일을 하도록 만드는 여정”이라고 설명했다.

-발아현미는 어떻게 하게 됐나요.

“고흥에 귀농한 농부가 찾아왔어요. 직접 만든 현미 발아 기계가 고장이 잦고 발아율이 낮으니 도와달라면서. 그가 ‘공돌이라 생물 사업은 안 되니, 당신이 가져다 창업해보라’고 하더군요. 마침 돈을 대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서 얼떨결에 창업하게 됐어요.”

-바로 사업에 뛰어들었나요.

“발아현미를 검색해봤어요. 아토피를 앓던 둘째 아들과 위암 말기였던 어머니에게 필요한 게 다 있는 거예요. 아토피 환자들은 스테로이드 연고를 바르고 항생제를 먹다 보니 간과 장내 미생물이 나빠지면서 몸이 망가져요. 면역력이 떨어지고, 분노 조절이 안 되는 등 성격도 이상해집니다. 발아현미에는 감마오리자놀이라는 천연 항산화물질이 있어 신장과 간 기능을 개선하고, 아라비녹실란 성분이 면역을 강화하고 암세포를 억제한다는 거예요. ‘이거 매력 있네’ 싶더라고요.”

2005년 회사를 세우고 ‘미실란(美實蘭)’으로 명명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희망의 열매를 꽃피우는 곳’이라는 뜻이다. 발아현미는 현미를 물에 불려 어둡고 서늘한 곳에서 싹을 틔워 만든다. 식감이 부드러워 먹기 쉬워지고 발아 과정에서 아밀라아제 효소가 생성돼 소화가 잘된다. 항암, 항산화, 면역 강화, 노화 방지, 장기능·고혈압·혈액순환 개선 같은 효과도 확인됐다.

-곡성에 회사를 차린 이유라면.

“당시 제 강의를 들은 곡성군수가 폐교와 논 등을 빌려주겠다는 거예요. 2006년 아내와 함께 초등학교 1학년이던 큰애, 유치원생이던 둘째의 손을 잡고 곡성에 왔지요. 지금이야 마당에 잔디가 있고 건물도 정비됐지만, 처음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건물은 거미줄로 뒤덮여 귀신이 나올 것 같았어요. 컨테이너 생활을 시작했지요.”

-미실란 차리고 맨 먼저 한 일은?

“모내기예요. 볍씨 278종을 골라 모를 키운 뒤 논 1000평에 품종별로 한 줄씩 손으로 심었어요. 어느 품종이 현미 발아가 잘되는지, 병충해에 강한지, 맛과 기능은 어떤지를 연구했어요. ‘삼광벼’가 발아현미로 가장 적합했지요. 발아기도 개량을 거듭해 특수 저온 건조 발아법에 적합한 4호기까지 제작했습니다. 덕분에 까다로운 현미 발아율을 95%까지 높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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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란 밥 카페 반하다'에서 내는 밥상./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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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 덕에 뜬 밥 카페

미실란 발아현미는 ‘맛이 좋고 영양이 풍부하다’고 소문 나면서 판매가 꾸준히 늘었다. 하지만 2015년쯤 위기가 찾아왔다. 쌀 소비가 줄고 발아현미 판매도 주춤하자 이 대표는 돌파구로 식당을 떠올렸다. ‘미실란 밥 카페 반(飯)하다’를 차린 것이다.

-발아현미로 직접 밥상을 차릴 생각은 어떻게 했나요.

“곡성군과 농민회에서 일본 연수를 보내줬어요. 버스 한 대가 오면 비켜주고 가야 할 정도로 산골에 있는 식당에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도시에서 컴퓨터공학 전공한 분이 지역 농산물로 만든 음식을 파는데 도시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와 먹고, 젊은 셰프들이 스펙을 쌓으려고 일하러 온다는 거예요. 우리나라도 이렇게 되겠구나 싶었지요.”

-식당은 아내가 운영하지요?

“일본 다녀와 ‘이런 게 있으니 해보자’고 제안했더니 눈도 마주치지 않더라고요(웃음). 집사람이 결심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죠. 식당 차리면 여자들이 제일 고생하니까요. 위기가 찾아오고 다시 제안하니까 ‘해봅시다’ 하더라고요. 곡성군과 농촌진흥청 지원을 받아 ‘농가맛집’으로 차린 게 ‘밥 카페 반하다’예요.”

농가맛집은 음식 관광 활성화를 위한 향토 음식 자원화 사업으로 선정된 외식업장을 말한다. 전국에 농가맛집이 100여 곳 운영되고 있다.

-식당이 처음부터 잘되던가요.

“첫해는 겨우 버텼어요. 그런데 영화 ‘곡성’이 개봉한 2016년부터 영화를 본 젊은 친구들이 곡성을 찾기 시작했어요. 저기 메타세쿼이아 길이 영화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곽도원이 오토바이 타고 지나가는 곳이래요. 우리 부부는 무서운 걸 싫어해서 ‘곡성’을 아직도 못 봤지만(웃음).”

-영화가 어떻게 도움이 됐나요.

“곡성역에 내려서 사진 찍으면서 메타세쿼이아 길 끝까지 걸었을 때쯤이면 배고프잖아요. 인근 밥집을 검색하면 우리 집밖에 안 나왔어요. 찾아와 먹어 보니 발아현미밥이 의외로 맛있는 거예요. 사진 찍어서 인스타에 올리더라고요. 그러자 갑자기 20대들이 막 오는 거예요. 코레일 잡지에서도 연락이 왔어요. 맛집으로 소문 나 인터뷰하겠다고. 20대부터 60대까지 몰려왔어요. 손님들이 2시간씩 대기를 했어요. 주말이면 400명이 넘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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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을 앞둔 들녘에서 바라본 미실란. 왼쪽 신축 중인 건물로 '밥 카페 반하다'가 자리를 옮겼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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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깃든 농촌에 청년이 온다

소설 ‘불멸의 이순신’을 쓴 김탁환 작가와 미실란이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발아현미밥 덕분이다. 2018년 3월 1일, 김 작가는 구례에서 대학 동기들과 하룻밤을 묵고 상경하는 길에 우연히 곡성에 들렀고, 밥 카페 반하다에서 점심을 먹었다. 에세이집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에서 그날의 밥상을 이렇게 기억했다. “밥은 구수했고 반찬은 정갈했다. 밥알 하나하나가 탱탱하게 씹히며 다른 맛을 내고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반백년을 밥상머리에 앉았지만 이런 밥은 처음이었다.”

김 작가가 이 대표에게 “밥맛이 무척 좋다”며 말을 걸었고 두 사람은 계속 만났다. 에세이집은 두 사람의 만남이 쌓인 기록물이다. 김 작가는 아예 작업실을 곡성으로 옮겼다. 미실란 2층 작업실에서 소설을 쓰고 농사도 짓는다.

-김탁환 작가와 함께 생태 책방 ‘들녘의 마음’을 열었는데.

“교사들을 만났더니 ‘곡성이 책방 소멸 지역이라 매 학기 아이들과 광주·순천으로 책방 견학을 간다’고 해요. 책방이 필요하다고 해서 열었습니다.”

-섬진강마을영화제는 왜 하시나요.

“책을 읽지 않는 60대 이상 지역 분들이 참가할 수 있는 행사가 필요하겠더라고요. 마을 전체를 아우르는 영화제 같은 걸 하면 좋을 것 같았어요. 작은들판음악회와 그림·사진전, 북토크도 엽니다.”

이 대표는 2009년 신지식인농업인상과 2015년 대산농촌문화상을 받았다. 2019년에는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모범농민으로도 선정됐다.

-농사만 짓기도 힘들지 않나요?

“농촌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거든요. 재미는 뭘까, 생각해보니 문화더라고요. 농업과 문화에 접합점이 있을 때 청년들이 관심을 기울입니다. 소비자들도 미실란과 우리가 만드는 발아현미에 대해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요.”

-청년 직원은 몇이나 되나요.

“총 12명 중에서 7명이 20~30대예요. 저를 포함한 나머지 다섯은 50대가 넷, 60대 한 명입니다. 아, 김탁환 작가까지 13명이네요. 같이 밥 먹으니까 직원이라고 주장하세요(웃음).”

-젊은 직원이 많네요.

“그렇죠. 사실 (소멸위험지역인) 곡성에선 70대도 ‘아이’인데. 처음에는 아무리 공고를 내도 안 왔어요. 지금은 오고 싶다는 청년들이 줄 서 있어요.”

-청년들이 왜 미실란에서 일하고 싶어 할까요.

“직원들에게 물어보니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다’고 해요. 속된 말로 ‘쪽팔리지 않다’는 거예요. 도시 대기업만큼 연봉을 주진 못해요.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미실란 매력 있다’면서 문화 이야기를 많이 꺼내니 은근히 자부심을 느낀대요. 강압적인 지시 없고 자발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도 해요.”

-자발적으로 일한다는 게 뭔가요.

“청년들이 알아서 필요한 일들을 해요. 핵심 역할을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지시를 했는데 지금은 청년들 의견을 듣고 어른 다섯이 움직입니다. 하하.”

◇들녘에서 터득한 자녀 교육

이 대표가 순천에서 곡성으로 집을 옮길 때 첫째는 초등학교 1학년, 둘째는 유치원생이었다. 도시로 나가도 모자랄 판에 남들과 정반대 결정을 한 셈이다.

-아내가 반대하지 않던가요.

“집사람이 교육학 석사예요. 상담심리학을 했는데, 아동 문제는 부모의 과한 교육열이 원인이래요. 연애할 때 ‘선배, 아이들 어떻게 키우고 싶어요?’ 물어보더라고요. ‘일단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아내가 ‘그러려면 애들이 그냥 하고 싶은 걸 하면 좋겠다, 공부를 아예 안 시켰으면 좋겠다’고 해요. 그러려면 도시보다 농촌이 좋으니까 아내도 곡성행을 반대하지 않았죠. 둘째가 아토피가 심하기도 했고요.”

-진짜 공부 안 시켰나요.

“곡성읍에 있는 피아노학원만 하나 다녔네요. 친구들과 놀려면 뭔가 같이 해야 해서. 국영수 과외 이런 건 한 적이 없어요. 공부로 스트레스 준 적도 없고요.”

-그래도 둘 다 국립대 이공대로 진학했지요.

“큰아이가 고교 2학년 1학기까지 대학 안 가겠다고 했어요. 저희는 좋다고 했죠. 2학기가 되니까 친구들이 다 대학 간다면서 자기도 가겠대요. 그러라고 했죠(웃음).”

-아이들 미래를 망치는 건 아닌가 불안하진 않던가요.

“벼를 키워보면 알아요. 자식 농사랑 똑같아요. 관행농업에서는 많은 수확을 얻고 싶어 질소 비료를 줘요. 쉽게 하고 싶어 제초제도 쳐요. 메뚜기가 먹을까 아까워서 살충제까지 쳐요. 그런데 수확하면 쭉정이가 많아요. 쌀알이 34개 달렸는데 14개는 먹지 못할 쭉정이. 투자 대비 손실이죠.”

-과외나 선행학습이 비료, 제초제, 살충제란 말인가요.

“질소 비료를 많이 쓰면 세포가 빨리 크게 자라지만 촘촘하고 단단하지 않아요. 비료를 주지 않으면 벼 세포가 촘촘하고 단단해요. 면역력이 강해요. 뿌리를 깊숙이 내려서 쓰러지지 않아요. 단단하게 뿌리 내리는 애들은 흔들리지 않지요. 저는 공부 대신 자립심과 인성을 강조합니다.”

-두 아들을 ‘유기농 교육’으로 키운 셈이군요.

“벼를 잡아 뺀다고 빨리 자라지 않듯, 자식 농사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김탁환은 에세이집에 이렇게 썼다. “인생에서 큰바람 한두 번 맞지 않는 이가 있을까. 절체절명의 순간, 어떤 이는 회생하고 어떤 이는 사라진다. (…) 벼 스스로 큰바람을 이겨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미실란의 벼가 쓰러지지 않은 것은 그가 세운 원칙, 친환경 농법의 힘이었다. 벼는 6월 초 모내기부터 8월까지 하루하루 싸우며 단단해졌다. 싸우면서 벼는 땅으로 더 깊이 내려가는 법을 익혔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법을 배웠다.”

-생각해둔 묘비명도 있나요.

“아들들에게 ‘씨앗 뿌리고 연구한 농부 과학자’로 새겨달라고 부탁해 놨어요. 오스트리아에 농업 연수 갔다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시골 마을 묘지에 ‘나는 농부입니다’라고 새겨진 묘비가 여럿이었거든요. 우리나라에선 판사, 검사, 총장은 새겨도 농부라고 쓴 비문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만큼 자부심이 있는 거지요. 저는 농부 과학자입니다. 농사 짓는 과학자라는 게 자랑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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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현 미실란(美實蘭) 대표. 미실란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희망의 열매를 꽃피우는 곳’이란 뜻이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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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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