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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토)

"하루 이동 6시간, 진료는 5분" 수백㎞ 원정길 나서는 부부는 웁니다[난임상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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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40대 난임 환자의 부산→서울 상경기

편집자주합계 출산율 0.72명 시대. 서울의 유명 난임 병원 앞엔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섰다. 동서고금 유례없는 저출산 추세가 무색할 정도다. 지난해 전국 난임 환자는 25만명. 모든 의료 인프라가 서울로 집중된 현실 속에서 아이를 갖기 위해 '원정 치료'를 떠나는 지방 난임 부부들은 오늘도 고통받는다. 치료를 받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지역 간 의료 불평등이 임신, 출산을 간절히 바라는 난임 부부들의 앞길을 막는다. 저출산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갖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지방 난임 부부의 원정 치료 실태를 들여다본다.
부산에 거주 중인 차은화 씨(44)는 동갑내기 남편과 10년 연애 끝에 올해 1월 결혼했다. 평생 살던 서울을 떠나 직장도 그만두고 부산서 일하던 남편 곁으로 갔다. 그런 그가 최근 3개월간 400㎞ 거리의 서울을 20번 가까이 방문했다. 지난 5월부터 서울 잠실의 대형 난임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산에도 체외수정(시험관) 시술이 가능한 난임 전문 병원이 15개(올해 3월 기준) 있다. 서울행을 택하기 전 부산 내 병원에서 검사도 받았다. 하지만 결국 첫 시험관 시술은 서울에서 진행키로 했다. 지난달 병원 인근에서 만난 은화 씨는 본인이 '40대 고령'에 '극난저(난소 기능이 크게 떨어진 상태)'라며 난임 상경을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은화 씨를 포함한 40~44세 난임 환자는 2022년까지 최근 5년간 31.1% 증가(건강보험심사평가원 2023년 발표)해 전 연령대에서 가장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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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혼에 늦어진 출산, 난임 늘어…의료기관 수도권에 집중
아이를 갖기 위해 병원을 찾는 난임 부부가 늘고 있다. 난임은 피임을 하지 않은 부부가 정상적인 부부관계에도 불구하고 1년 이내에 임신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로 정의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난임 환자 수는 총 25만1173명이다. 성별로 보면 여성 16만명, 남성 9만명이다. 5년 전인 2018년 23만명 수준이었던 난임 환자 수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취업에 매달리다 결혼이 늦어지고 주거 안정을 꿈꾸며 임신을 미루고 경제 활동을 하다 보니 아이 낳는 시기가 자연스레 늦춰진다. 지난해에는 40대 초반 여성의 출산율이 7.9명으로 20대 초반(3.8명)의 두 배 이상이었다. 난임 문제로 병원을 찾게 되는 부부가 덩달아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합계출산율 0.72명 시대, 저출산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임신을 간절히 바라며 노력을 쏟아붓는 이들이 난임병원을 찾고 있다. 난임 병원은 대부분의 의료 인프라와 마찬가지로 수도권에 집중해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난임 시술 의료기관은 지난 3월 말 기준 총 269개다. 이 중 서울 21.9%(59개), 경기도 20.1%(54개) 등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난임 시술 의료기관은 대표적인 난임 시술인 인공수정과 시험관 시술을 하는 병원으로 정부가 지정한다. 두 시술을 모두 할 수 있는 병원은 전국에 154개다. 이 역시 45.5%가 서울과 경기권에 있다. 인천을 포함한 수도권의 비중은 50.0%로 딱 절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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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난임 부부들은 의료시설이 몰려있는 수도권으로 쏠린다. 심평원 데이터를 보면 난임 시술(보조생식술) 환자의 수도권 병원 진료 비중은 갈수록 늘고 있다.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 세 지역의 병원에서 진료받는 환자 비중은 2019년 1월 64.5%에서 올해 1월 67.7%로 6년 만에 3.2%포인트 늘었다. 이 수치는 매해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난임 시술 100건 중 68건이 수도권 병원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의미다. 2019년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난임 시술 의료기관 중 환자 수 상위 20개 기관의 소재지는 서울 8곳, 경기 6곳, 부산 2곳, 대구·광주·대전·울산 등이 각각 1곳이었다.
"예측 불가 일정 터지면 기차표 못 구해 발 동동"
은화 씨도 그렇게 상경을 결정한 난임 부부다. 시험관 시술을 반대하는 남편을 설득해가며 어렵게 병원을 선택했지만, 은화 씨는 예상보다 훨씬 힘들다고 털어놨다. 결혼하며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시작한 은화 씨는 만약 직장 생활을 지속했다면 회사를 그만두던지, 시술을 포기하던지 둘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했다. "병원에 자주 가야 한다고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대기 시간도 길어요. 세 시간을 기다린 적도 있어요. 그래서 진료 예약 시간이 오전이어도 오후 5시에 내려가는 기차표를 사둬요. 언제 끝날지 몰라서요."

은화 씨의 난임 치료를 힘들게 하는 건 한둘이 아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정해진 시간에 맞춰 주사를 맞고 약을 먹는다. 시술과 검사를 위해 병원을 수없이 드나든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데이터를 보면 지난해 불임 환자 1인당 병원 내원 일수는 평균 6일이었지만, 시험관 시술 환자들은 난자채취. 초음파 검사, 배아 이식 등을 위해 한 달에 수일씩 방문하는 일도 허다하다. 대형 병원의 극심한 대기 행렬도 견뎌내야 한다. 진료는 10분 컷이다. 결과가 좋지 않을까 봐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가뜩이나 쉽지 않은 은화 씨의 난임 치료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이동 문제다. 치료차 병원을 방문하려면 기차표나 비행기 티켓이 꼭 필요한 데 표를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부산역에서 서울 잠실까지 수서고속철도(SRT)로 이동하는 은화 씨는 표를 미리 확보하려고 일주일 내내 기차표를 예약해둔 적도 있다고 했다. '생리(월경)가 시작한 뒤 2~3일째 되는 날 방문하라'는 병원의 지시를 맞춰야 하는데 그날이 언제가 될지 예측 불가하기 때문이다. "취소 수수료가 들죠.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병원을 아예 올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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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표를 구하지 못하면 급히 비행기 티켓을 구해 서울로 올 방법을 찾기도 한다. 그런 날엔 부산에서 김해공항까지 1차, 김해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2차, 김포공항에서 서울 잠실 병원까지 3차로 택시, 비행기, 지하철 등 하루에만 서너 종류의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한다. 그렇게 이동하다 보면 체력은 금방 동난다.
병원 가느라 한 달 교통비 80만원 쓴다…숙박비도
교통비도 어마어마하게 든다. 치료 중인 본인 혼자 이동해도 하루 왕복 교통비가 15만원이라고 했다. 남편과 함께 부부가 움직이면 하루에 30만원이 날아간다. 마취가 필요한 시술 등 보호자가 꼭 필요한 때에만 남편이 동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게 지난 8월 두차례 난자 채취를 위해 은화 씨가 쓴 한 달 교통비만 70만~80만원이었다.

시험관 시술은 크게 난자 채취·이식 등 각종 시술과 초음파 확인 등 검사로 이뤄진다. 난자 채취 등 일부 시술은 정확한 시간에 병원에 도착하지 못하면 공들여 준비한 시술 자체를 하지 못한다. 그런 일정이 잡히면 은화 씨는 전날 서울로 와 하루 숙박한다고 했다. 비행기로 이동하다가 연착한 경험도 있는 만큼 시간을 안전하게 맞추려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숙박비 20만원이 추가된다.
불가피한 선택 난임 상경, 그 험란한 여정 "채취 시간이 오전 9시 30분이었어요. 첫 비행기를 타도 시간을 맞출 수가 없고 기차는 새벽 6시 이전에 타야 하는데, 그러려면 밤을 새야 했죠. 몸컨디션도 좋아야 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결국 숙소를 잡을 수밖에 없었어요. 남편이 좀 더 빨리 결혼했으면 고생할 일 없었을 거라면서 미안하다고 하는데 속상했어요."
이러한 상황은 은화 씨 만의 일이 아니다. 난임 치료차 '상경한' 지방 난임 부부들은 이렇게 토로했다. "진료실 나오자마자 기차편 예매부터 합니다", "체력적으로 너무 지쳐요. 혼자 생각만 많아지고 체력은 저하되니 머리가 멍해져요",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하다 보니 비용도, 시간도, 체력도 만만치 않아요"

이들이 힘겨운 과정을 견디고 서울행을 택하는 이유는 딱 하나 ‘아이를 갖기 위해서’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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