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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목)

[성민엽의 문학으로 세상읽기] 청포도가 익어가는 신화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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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성민엽 문학평론가


청포도의 색은 녹색인데 왜 청포도라고 하는 것일까요? ‘푸를 청(靑)’이라는 한자는 원래 푸른색과 녹색을 다 포함했고, ‘푸르다’라는 우리말도 푸른색과 녹색을 다 포함합니다. 그래서 녹색이지만 청포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시인 이육사가 1939년에 발표한 시 ‘청포도’의 처음 두 행에서 “내 고장 七月(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칠월은 음력일 것입니다. 포도는 보통 양력 8월에 익어가고 8월 말부터 10월 말까지 수확을 하니까요. 금년의 그 칠월은 이미 지났고 지금은 수확이 한창일 때이지만, 청포도를 먹다 보니 문득 청포도가 익어가는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을 시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청포도-흰 돛단배-청포 손님

세 사건 어우러져 신화적 의미

‘손님=독립’이라는 해석 많지만

고달픈 시인의 자기연민 느껴져

중앙일보

이육사의 시 ‘청포도’는 “손님”이 누구냐를 두고 숱한 해석을 낳았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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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두 번째 연부터 네 번째 연까지는 끊어지지 않고 하나로 연결된 예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 속에는 세 가지 사건이 들어 있고 그 세 사건은 인과 내지 조건, 혹은 동조의 관계로 연결됩니다. 먼저 청포도가 익어가는 사건. 그 청포도에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힙니다. 그러면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그다음 사건이 일어납니다. 손님이 청포를 입고 찾아옵니다.

처음 두 행에서 청포도가 익는 것은 해마다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해마다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손님이 찾아오는 일이 이루어질 때 청포도의 결실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신화적 사건이 됩니다. 이때 청포도가 익는 것과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여는 것과 청포를 입은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완벽한 동가(同價)가 됩니다.

이 푸른색의 신화적 사건이 구현되면 시의 화자와 손님은 함께 잔치를 벌여, 청포도를 먹고 두 손을 포도 물에 함뿍 적십니다. 신화의 육화(肉化)입니다. 신화와 동화되는 것입니다. 하얀색은 그 푸른색 신화를 준비합니다. 흰 돛단배에는 청포 입은 손님이 타고 있고, 은쟁반과 하얀 모시 수건은 청포 입은 손님과 푸른 포도를 기다립니다. 시적 진술의 현재에 그 신화적 사건은 아직 구현되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습니다. 손님을 광복된 조국, 혹은 평화로운 미래 세계라고 보는 해석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나 애국지사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작품 바깥에서 시인의 실제 삶에 대한 정보를 가져와 시 작품 안에 나타나 있는 것들과 연관을 지으면 이런 해석들은 충분히 성립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심지어 작품이 언제 쓰였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시를 읽은 독자라면 절대로 그런 해석을 할 수 없습니다. 이때는 내재적 관점에서의 해석만 가능합니다.

내재적으로 꼼꼼히 따져보면 모호한 구석이 많습니다. 그 손님을 화자가 전에 만난 적이 있는지 없는지, 또 돛단배가 오면 찾아온다고 한 것이 그 손님의 말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말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이곳을 ‘내 고장’이라고 칭하는 화자는 이곳이 고향이자 거주지인 사람이라고 여겨지는데, 손님도 이곳이 고향이고 전에 이곳에서 거주했던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가능한 여러 가지 해석 중 저에게 가장 공감이 가는 것은 손님을 시인 자신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시인이 자신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이 고장에 사는 사람으로 만들고 다른 하나는 이 고장으로 찾아오리라 기대되는 사람으로 만든 뒤, 이 고장에 사는 사람을 화자로 내세웠다고 보자는 것입니다. 이 고장은 칠월이면 청포도가 익어가는 평화로운 곳이고 화자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데 반해 바다 건너에 있는 손님은 몸이 고달픕니다. 손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고장에 와서 휴식과 위안을 얻는 것이고 화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손님에게 휴식과 위안을 주고 싶은 것입니다.

제 느낌으로는 시인 자신은 화자보다도 오히려 손님 뒤에 숨어 있고, 그렇게 숨은 채 슬며시 화자를 앞세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다른 시들에 나타나는 강철 같은 의지와는 다른, 깊은 자기 연민이 이 시의 기본 정서로 느껴집니다. 자기 연민과 강철 같은 의지는 상충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상호보완적인 것 아닐까요?

포도 수확기인 지금, 청포도를 드시면서 이육사 시인의 시 ‘청포도’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합니다.

성민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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