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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 (목)

HBM 전쟁 2라운드도 SK하이닉스 ‘선공’ [반도체의 겨울? Say,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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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대 12단 칩 최초 양산…1위 질주
양산 초기 수율 잡고 ‘N커브’ 조기 극복


인공지능(AI) 반도체 ‘피크아웃’ 우려에도 불구하고 SK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연일 신기록을 써 내려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HBM 5세대(HBM3E) 12단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양산에 나서는 등 삼성전자와 격차를 점차 벌리고 있다. SK그룹 편입 이후 SK하이닉스가 특정 카테고리에서 선두 지위를 달성한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만년 2위 SK하이닉스가 부동의 1위 삼성전자를 따라잡은 배경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매경이코노미

SK하이닉스가 대만 TSMC가 개최한 OIP 포럼에서 HBM3E 제품과 엔비디아 H200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최근 SK하이닉스는 세계 최초로 HBM3E 12단 제품을 양산해 엔비디아에 공급할 예정이라 밝혔다. (SK하이닉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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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양산·공정, 연결성 높여

초기 수율 확보 차별화

HBM은 적층 난도에 따라 1세대(HBM)-2세대(HBM2)-3세대(HBM2E)-4세대(HBM3)-5세대(HBM3E) 순으로 개발돼왔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4세대까지를 HBM 1라운드로 본다. 1라운드에서는 SK하이닉스가 승기를 잡았다는 데 이견이 없다. 2라운드는 5세대 HBM3E(8단·12단 등)부터 6세대 HBM4 이후를 아우른다. 2라운드에선 적층 경쟁 심화로 공정 난도가 훌쩍 뛴다. 이 때문에 올 초에는 메모리와 파운드리, 패키징 역량을 고루 갖춘 삼성전자에 유리한 국면이 펼쳐질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하지만 공정 난도 상향에도 불구하고 SK하이닉스 우위 구도가 좀처럼 뒤집히지 않는다.

최근 SK하이닉스는 HBM3E 12단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양산한다고 밝혀 또 한 번 주목받는다. 지난 3월 SK하이닉스가 HBM3E를 엔비디아에 납품한 지 약 6개월 만이다. SK하이닉스가 HBM 2라운드에서도 기선 제압에 성공했단 평가다. 산업계에서 기업 간 지위 역전은 매우 드문 현상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여러 실증연구에 따르면, ‘조직 지위(Status)’는 시장 참여자 ‘인식(Perception)’을 기반으로 형성되므로, 다년간 축적된 지위 체계는 실제 품질 변화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변화하지 않으며 안정적인 속성을 보인다. 물론 HBM을 포함한 전체 D램 시장 1위는 여전히 삼성전자다. 하지만, HBM이라는 ‘신생 카테고리’에서 SK하이닉스가 1위를 질주하면서 전체 D램 점유율 격차도 줄고 있다. HBM 시장 선전이 SK하이닉스 재평가 계기로 작용하고 있단 분석이다.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에서 선두 지위를 유지하는 배경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무엇보다 통합적 관점에서 구축한 태스크포스(TF)가 HBM 제조 단계별 상호 연결성을 높여 최적 생산 체제로 이어졌단 분석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019년부터 ‘스피드 램프업(Speed Ramp-up)’ TF를 가동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연구개발(R&D) 단계부터 양산과 생산성을 동시에 고려해 기술 개발에 주력했다는 점이다. 지난해부턴 수율 관리 기능도 더했다.

통상 기술 기반 조직에서는 선행기술과 양산 조직 간 갈등과 반목이 적지 않다. 선행기술팀에서 만든 기술은 연구개발과 공정개발팀에서 넘겨받아 양산 수율에 맞춰 재조정하는 과정을 거친다. 대부분 반도체 기업은 제조와 공정 프로세스가 분절된 구조로 상호 연결성이 낮다. 이 경우 유기적인 협업과 시너지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다수 전문가 지적이다.

특히, AI 반도체 산업에선 양산 초기 수율이 고민거리다. 최근 IT 제조업 분야는 불연속적 기술 발전으로 기존 기술과 제품의 수명 주기가 갈수록 짧아지는 추세다. 이런 상황에서 양산 초기 수율 목표를 달성 못하면 짧은 수명 주기로 기업 손익 변동성이 대폭 확대된다. HBM과 GPU 역시 지속적으로 신규 칩이 시장에 출시되면서 기존 칩 감가상각 속도가 더 빨라진다. 양산 초기 수율 부진이 누적되면 중장기 기업 성과에도 악영향이 불가피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에 비춰, SK하이닉스는 선행기술과 양산 조직 간 상호 연결성을 높인 덕분에 초기 수율 확보에 성과를 내 ‘N자형 커브’ 현상을 조기 극복할 수 있었단 진단이다. N자형 커브는 선행기술에서 양산 이관 단계에서 급격한 수율 하락이 발생한 뒤 시차를 두고 수율이 회복되는 현상을 뜻한다. SK하이닉스 측은 “기술 개발과 양산 전 과정에서 ‘원팀 스피릿(One Team Spirit)’이 접목되면서 ‘엔-커브(N-Curve)’ 현상을 조기 극복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데이터 기반 스마트 팹(Fab·반도체 생산공장) 구축도 보탬이 됐다. SK하이닉스는 향후 스마트 팹에 AI 기술을 도입, 제조 경쟁력을 더 강화한다. SK하이닉스 측은 “탄탄한 기술 기반을 통해 고객이 요구하는 차세대 제품을 적기 출시하며 고부가가치 D램 분야 선점 효과를 누릴 것”이라 밝혔다.

반면, 삼성전자는 범용 D램 시장에서 오랜 기간 1위를 달려 ‘지위 불안(Status Anxiety)’에 크게 노출돼 AI 등 신산업에서 전략적 유연성이 부족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지위 불안은 지위 이론을 연구하는 일군의 학자들이 주장한 개념이다. 높은 지위를 가진 조직은 가격 프리미엄 형성, 비용 절감 등 유무형 이익을 누리지만, 실수나 결함 등이 외부로 노출돼 기존 지위가 위협받는 상황을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산업 현장에서도 ‘지위 불안’에 휩싸인 삼성의 전략적 경직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1등이 아닌 사업을 벌여서는 안 된다’ ‘삼성의 모든 사업부는 1등을 해야 한다’는 오늘날 삼성을 있게 한 경영 철학이 새로운 반도체 환경에서는 전략적 유연성을 떨어뜨린단 진단이다. 삼성 안팎에선 1등 강박이 ‘사일로 현상(Silo Effect)’ 심화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시선이 적지 않다. 학계에서는 사일로 현상의 폐단 중 하나로 조직 혹은 부서 간 ‘단절’을 꼽는다. 각 사업부 간 과도한 경쟁으로 상호 연결을 거부하는 현상이 속출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출신 IT 장비 회사 임원은 “1등을 해야 한다는 삼성의 강박이 결과지상주의로 변질되면서 새로운 영역에서 나타나는 실수나 오류를 조직의 핵심 자산으로 내재화하는 과정을 가로막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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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하이닉스 과제

설비투자 무한 반복·패키징 역량

SK하이닉스에도 고민거리는 적지 않다. 안정적 현금 창출이 가능한 여러 사업부를 둔 삼성전자와 달리, SK하이닉스는 메모리와 낸드 등 설비투자가 끝없이 반복되는 구조다. 이익 레버리지 효과로 재무제표상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뛰어나지만 기업 여윳돈인 잉여현금흐름(FCF) 측면에선 아쉬운 점이 적지 않다는 게 다수 전문가 시각이다. 익명을 원한 반도체 애널리스트는 “잉여현금흐름을 초과하는 배당금 지급과 M&A 등을 위해 SK하이닉스는 차입금을 좀처럼 줄이기 힘든 구조”라며 “그룹 편입 이후 10여년 동안 번 돈은 거의 다 공장 건설과 고가 장비 구입에 썼고 HBM 등 설비투자를 위해 돈을 또 빌려야 하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라고 짚었다.

패키징 역량 고도화도 SK하이닉스가 풀어야 할 숙제다. 기존 AI 가속기는 GPU와 HBM을 수평으로 연결하는 2.5D 구조다. 6세대부턴 GPU 위에 HBM을 쌓는 3D 방식이 요구된다. 칩을 수직으로 쌓으면 전자 이동 거리가 짧아져 전류 이동 속도가 개선되고 이는 데이터 처리 속도 향상으로 이어진다. 6세대 HBM4에선 입출력 단자(I/O) 수도 5세대보다 2배 많은 2048개로 확대된다. 비슷한 크기 칩에 단자 수가 2배 늘어나므로 더 미세 공정이 요구된다.

SK하이닉스는 패키징 부문에서 공격적인 설비투자로 HBM ‘1등’ 굳히기를 노린다. SK하이닉스는 5조2000억원을 투자해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AI 메모리용 첨단 패키징 생산기지를 건설한다. 인디애나 공장에서는 2028년 하반기부터 차세대 HBM 등 AI 메모리 제품을 양산한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9호 (2024.10.09~2024.10.1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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