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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수)

원하는 효능만 골라…맞춤 신약개발 길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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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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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효능은 원자가 어떻게 배열되는지에 크게 좌우된다. 단 한 개의 원자 차이만으로 효능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을 정도다. 신약 개발에서 원자 편집이 '꿈의 기술'로 불리는 이유다.

국내 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원자 편집에 성공했다. 이 기술은 새로 개발하는 치료제의 효능을 최대치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박윤수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화학과 교수 연구팀은 오각 고리 형태의 화합물 '퓨란'의 산소 원자를 질소 원자로 편집하는 데 성공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지난 3일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렸다. 사이언스는 과학 분야 최고 권위 학술지다.

의약품은 복잡한 화학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 효능은 단 하나의 핵심 원자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산소나 질소 같은 원자는 바이러스에 대한 약리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이런 현상을 '단일 원자 효과'라 한다. 따라서 복잡한 분자 내에서 특정 원자를 선택적으로 편집할 수 있다면 신약 개발에 중요한 돌파구가 된다. 과학자들과 제약 업계는 이 같은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아직 선택적으로 원자를 편집할 수 있는 기술은 없다. 분자의 골격을 이루는 '방향족 고리'가 반응성이 낮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고리가 단단하다 보니 한 개의 원자만을 떼어 내고 붙이는 식으로 편집하는 게 어려웠다.

연구팀은 빛 에너지를 활용하는 광촉매를 도입해 이 같은 한계를 극복했다. 광촉매는 방향족 고리를 잘라내는 가위 역할을 한다. 연구팀은 여러 광촉매 중 방향족 고리를 잘라내는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촉매를 선별했다. 유기 광촉매인 '아크리디늄' 기반의 촉매가 가위 역할을 수행하는 데 가장 효과적임을 확인했다.

박 교수는 "아크리디늄 촉매는 빛을 받으면 산화력이 높아진다"며 "높아진 산화력이 방향족 고리의 안정성을 낮추게 되고 원자 편집이 가능한 상태가 된다"고 설명했다.

원자 편집은 어떻게 이뤄질까. 먼저 광촉매에 빛을 쪼인다. 빛을 쪼이면 방향족 고리의 안정성이 낮아지고 분자의 골격에 틈을 보이게 된다. 이때 원자를 제거한다. 원자가 없어진 곳은 빈 공간으로 남는다. 이 공간에 핀셋을 활용해 원하는 원자를 투입한다. 이렇게 원하는 원자 배열을 가진 신약 후보물질이 탄생하는 것이다.

연구팀은 여러 방향족 종류 중 산소 원자를 가진 오각 구조의 퓨란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퓨란의 산소 원자를 광촉매를 활용해 선택적으로 제거했고, 핀셋을 활용해 질소 원자로 갈아 끼웠다. 이를 통해 제약 분야에서 널리 활용되는 '피롤 골격'으로 전환시켰다. 피롤 골격이란 약효가 높아 신약 개발 분야에서 새로운 화합물 합성 시 많이 사용되는 구조 중 하나다. 고지혈증 치료 물질인 '아토바스타틴', 간질종양 치료 물질인 '수니티닙' 등이 피롤 골격을 가지고 있다.

이번 기술은 특히 보통의 온도와 기압(상온 및 상압) 조건에서 구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방향족 고리의 안정성을 낮추는 방법에는 고온이나 고에너지 자외선을 활용하는 방식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원자 편집 단계가 복잡해지고 비용도 더 들어간다. 고온이나 고에너지의 가혹 조건이 예상치 않은 반응을 유발해 반응 제어가 어려울 가능성도 높다.

박 교수는 "이번에 개발한 기술은 가시광선을 활용한다"며 "비교적 온화한 반응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는 제약 분야의 중요한 숙제였던 신약 후보물질 라이브러리 구축에 새로운 장을 열 것으로 평가된다. 박 교수는 "다단계 합성 대신 약물 후보 간 직접적인 전환이라는 새롭고 간결한 선택지를 제시한다. 이번 연구가 신약 개발 과정을 혁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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