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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일)

[김윤덕이 만난 사람] 벙커에 빠진 인생? 안 되면 들고 나와라, 거기가 끝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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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A투어 500회 출전 앞둔 최경주

골프를 몰라도 최경주가 왜 ‘검은 탱크’지는 첫눈에 알 수 있다. 온몸에 태양이 이글거리고, 양복 차림인데도 눈에서 레이저가 쏟아졌다. 54세에 KPGA 투어 SK텔레콤 오픈, PGA투어 더 시니어 오픈에 진격해 우승컵을 거머쥔 이 남자는 “내년 7월 디 오픈에서 PGA 투어 500회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겠다”고 했다.

두 차례 우승 후 미국 현지에서 CGN 다큐 ‘휴먼네컷’을 촬영했다. 갑상선 수술 후 신앙 안에서 절제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는 그는, “물에 빠진 줄 알았던 공이 작은 섬에 안착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며 웃었다.

◇'디 오픈’서 우승? 지구가 뽀개질 것

-30년 프로골프 인생에서 요즘이 최고로 재미있다고 했더라.

“예전보다 공이 똑바로 날아간다. 아이언 샷은 내 인생에서 지금이 최고로 잘 맞는 것 같다. 욕심, 집착을 버리니 몸이 가벼워지고 편해졌다.”

-지난 5월 KPGA투어 SK텔레콤 오픈에서 극적인 우승을 이뤘다.

“물에 빠진 줄 알았던 공이 작은 섬에 안착해 있었다. 백만 번을 쳐도 그곳에 다시 공을 올려놓을 순 없을 거다. 인간의 능력엔 한계가 있다는 걸 그 경기가 보여줬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아무도 모른다(웃음).”

-최고령 우승이라 ‘중년 최경주’의 체력에 관심이 집중됐었다.

“알코올 끊은 지 4년 됐고, 콜라·사이다 같은 탄산음료에 이어 최근엔 커피마저 끊었다. 3년째 ‘천일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시합이 있든 없든 매일 스쿼트 150개, 팔굽혀펴기 25개, 손 악력 운동 20개를 한다. 우승한 날도 예외가 아니다.”

-담배 끊기가 제일 어려웠다던데.

“아, (참느라고) 나무를 몇 그루 뽑았는지 모른다, 하하!”

-세계 골프 레전드들의 경연장인 ‘더 시니어 오픈 챔피언십’에서도 우승했다.

“변덕스러운 날씨, 커누스티 링크스의 좁고 깊은 항아리 벙커가 늘 힘들었는데 아이언 샷과 퍼팅이 잘되면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 평소 내가 ‘큰 어른’으로 모시는 잭 니클라우스도 ‘엑설런트’했다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더라.”

-PGA 투어 500회 출전이 두 경기 남았다던데, 그게 쉬운 기록이 아닌가보다.

“타이거 우즈도 400회가 안 된다. 25회씩 20년을 꼬박 출전했어야 세울 수 있는 기록이다. 20년 동안 PGA 선수 자격 요건을 계속 충족시키면서 출전했다는 뜻이라 우승 이상으로 여기고 축하해준다.”

-내년 디오픈에서 500회도 기록하고 우승까지 한다면?

“그건 지구가 쪼개지는 일이다, 하하!”

조선일보

최경주가 지난 5월 19일 제주도 서귀포시 핀크스 골프클럽에서 열린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SK텔레콤 오픈에서 우승한 뒤 18번 홀의 작은 섬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KP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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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에 독기가 쌓인 이유

-최경주, 양용은 등 ‘형님’들 활약에 비해 젊은 선수들 승전고가 끊긴 지 오래됐다고 한다.

“그만큼 경쟁이 심해서다. 매년 전 세계에서 15~20명의 선수들이 새로운 경쟁자로 들어온다. 나는 지금도 후배들이 엄청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승이 없을 뿐인데, 기다리며 지켜봐야 한다.”

-자서전에는 ‘나는 잡초인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화초에 가깝다’고 썼던데.

“음… 그건 노 코멘트다(웃음)!”

-PGA는 맹수들의 치열한 전쟁터라고 했더라. 20년 전으로 돌아가도 다시 도전할까?

“아마 그럴 것이다. 목표가 생기면 꿈이 생기고 꿈을 이루려면 도전하는 건 당연하니까.”

-박세리와 비교해 최경주는 시기상조라며 만류했다던데.

“한국에서 잘하고 있고 아시아에서 인정받는데 뭐 하러 미국까지 가냐고 말리더라. 그러나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까워 피땀 흘려 준비했다. 우선 아내가 ‘갑시다!’ 해줬고, 피홍배 삼정그룹 회장님, 김귀열 슈페리어 회장님이 ‘넌 할 수 있다’며 후원해주셨다.”

-막상 가보니 너무 힘들어서 울었다고.

“연이은 컷탈락도 힘들었지만 동료 선수, 경기 위원들에게 알게 모르게 당하는 차별, 그리고 영어의 어려움이 컸다. 스트레스가 쌓이니 포식하게 되고 배도 커지고. 내 눈의 독기는 그때 다 쌓인 거다(웃음).”

-다큐에선 영어가 유창하던데.

“미국서 20년을 살았는데 하루 한 마디만 배워도 몇 마디인가(웃음). 영어가 서툴 때도 아무 말이나 하고 휙 가버려 기자들이 황당해했는데, 날 취재하려면 너희들이 한국말 배워 오라는 배짱을 부렸다.”

조선일보

최경주가 지난 7월 29일 영국 스코틀랜드 커누스티 골프 링크스(파72)에서 열린 PGA투어 시니어 오픈 챔피언십에서 한국인 최초로 챔피언스 투어 메이저 우승을 차지한 뒤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 /PGA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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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되겠지’라는 함정

-2002년 PGA투어 컴팩 대회에서 첫 우승 했을 땐 엄청 기뻤겠다.

“아내를 뼈가 으스러져라 안아줬지(웃음).”

-’탱크’라는 별명은 2003년 프레지던츠 컵에서 생겼다더라.

“이언 베이커 핀치라는 호주 선수가 방송 인터뷰 중 ‘KJ(최경주)는 한번 물면 놓지 않고 탱크같이 밀고 간다’고 하는 바람에.”

-2007년 메모리얼 챔피언십에선 잭 니클라우스에게 우승 트로피를 받았다.

“코리아의 작은 섬 완도에서 당신의 책 ‘마이웨이 골프’를 읽으며 꿈을 키웠다고 하자 니클라우스는 물론 200여 기자단이 깜짝 놀라더라. ‘하늘에는 OB(코스 일탈)가 없다’는 그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아이언 샷은 높이 칠수록 좋다는 뜻이다. ‘가장 위대한 스승은 너 자신’이란 말에 큰 거울 세워 놓고 스윙 연습을 했었다.”

-타이거 우즈의 키가 부러워 수술까지 생각했다는 게 사실인가?

“키가 컸다면 공도 호쾌하게 치고 러프(깊은 풀)에서 더 잘 탈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뼈를 이어붙이는 수술을 독일이 잘한다고 해서 알아보니 수술만 3년, 재활만 3년 걸린다더라(웃음). 포기하고 정확도를 높이는 훈련에 집중했다.”

-2008년 소니 오픈 우승 후 등의 통증이 겹쳐 랭킹이 추락하자 ‘그동안 운이 좋았다’ ‘한물갔다’는 평이 쏟아졌다.

“안타까운 마음에 비난과 혹평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인내하고 기다리는 시간으로 삼았다.”

-’슬럼프’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자기 도피, 핑계 같아서다. 도전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걸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기간이 왜 슬럼프인가. 내겐 스윙 자세 교정하고 골프채도 이것저것 써보면서 비거리(飛距離)를 늘리고 성적을 높이는 시간이었다.”

-’골프는 내가 흘린 땀의 무게를 정확하게 계산해준다’고 했더라. 지금도 연습 벌레인가?

“젊었을 땐 하루 1000개씩 공을 쳤지만 요즘은 척추에 무리가 와서 400개 치면 집에 가야 한다(웃음).”

-후배들이 벙커샷의 달인이 된 비결을 물었더니, 하루 8시간씩 한 달간 벙커에서 나오지 말고 연습하라고 했다던데.

“그건 좀 과장이고, 매일 4시간씩 16년을 했다. 1시간 연습이 1주일 되고, 한 달이 1년으로 이어지면 변화와 성장은 반드시 온다.”

-지루하고 힘든 시간이다.

“몸으로 이해해야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자신감도 나온다. 나처럼 골프를 늦게 시작한 선수에겐 연습량이 절대적이어서,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시합에선 심박수가 78~85bpm 정도 유지돼야 하는데 자신감이 없으면 90 이상 올라가 몸이 떨려온다. 마음이 불안해 장갑을 뺐다 꼈다 하게 되고.”

조선일보

지난 9월 30일 서울 강남구 선릉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는 최경주 선수. 지난 5월 KPGA투어 SK텔레콤 오픈에서 우승한 뒤 첫 한국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 온 그는 "스쿼트, 푸시업, 악력 등 3년째 천일운동을 매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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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일을 장담하지 말라

-고집과 강단은 어부였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건가?

“평생을 바다와 싸운 아버지에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함이 있었다. ‘고기 떼가 오기 전에 그물을 쳐야 고기를 잡지, 고기 떼가 오는 걸 보고 그물을 던지면 이미 늦다’는 말씀도 기억난다. 지금도 유자 농사 짓고, 배추 고추 마늘 양파 다 키워서 자식들한테 보내주신다.”

-자서전 ‘코리안 탱크, 최경주’에 아내 김현정씨가 침대 끝에서 남편의 발을 잡고 기도하는 대목이 뭉클했다.

“펄떡이는 망둥이를 관리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나(웃음). 아내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특별한 선물이다.”

-아내를 따라 온누리 교회에 나갔다고 하더라.

“말이 크리스찬이지 하나님 안에서 산 적은 별로 없다(웃음). 하용조 목사님이 늘 강조하셨던 ‘겸손의 삶’을 나이 들어서야 깨닫고 실천하려 노력한다.”

-CGN 다큐 ‘휴먼네컷’에선 신앙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

“욕심과 승리에 사로잡혀 갈팡질팡 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매일매일 회개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는 육(肉)의 삶엔 평안이 없다.”

-최경주 재단을 통해 기부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것도 그 때문인가?

“상금 액수가 많아지니 재단을 만들어서 기부하면 세금 혜택도 받고 어려운 처지의 후배들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수, 일반 장학생 합쳐 700명이 거쳐갔다. 박민지, 김민규, 이재경 같은 선수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다.”

-18홀을 다 돌기 전엔 승부를 알 수 없다고 해서 골프를 인생에 비유한다.

“잠언서에 ‘내일 일을 장담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 지난 7월 더 시니어 오픈에서 우승할 수 있었던 것도 미리 걱정하지 않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쳤기 때문이다. 지금 잘나간다고 호언장담해도 내일이나 모레, 한 방에 갈 수 있다.”

-최경주의 인생은 몇 홀쯤 와 있을까.

“14번 홀? 아직 다섯 홀이 남아 있으니 거기서 어떤 역사가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인생과 골프는 계단 오르기와 같다고도 했더라.

“역도부 시절 오리걸음으로 50계단 오르내리는 훈련을 했는데 빨리 가려고 두세 계단을 한 번에 오르려 하면 사고가 났다.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서두르거나 반칙을 하면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걸 그때 배웠다.”

-인생의 벙커에 빠진 사람들에게.

“정 안 되면 들고 나와라. 거기가 인생의 끝이 아니다.”

-PGA투어에 처음 태극기를 휘날린 최경주는 골프백과 신발 뒤꿈치에 태극 문양을 붙이고 다녀서 유명했다.

“어딜 가든 태극기를 보면 힘이 되고 은혜가 된다. 해외 공항에 가도 태극기가 있는지부터 확인한다. 한번은 시애틀 경기장에 태극기가 안 보여 내가 직접 구해다 걸어준 적도 있다(웃음).”

-’대한민국 정부가 스폰서냐’는 말도 들었다던데.

“2010년 나이키와 헤어지고 1년간 후원사를 못 구했다. 스폰서 로고가 없는 모자를 쓰려니 자존심이 상해 자수로 태극기를 박고 나갔더니 외국 선수들이 ‘너는 대한민국이 스폰서냐’고 묻더라. 그 후 SK텔레콤이 후원사가 돼 모자에 ‘SK’를 박고 나갔는데 동료들이 또 감탄했다. 너희 정부는 정말 최고라고! SK를 사우스 코리아(South Korea)의 약자로 이해한 거다, 하하!”

☞최경주

1970년 전남 완도 출생. 완도중 시절 역도를 하다, 완도수산고에서 골프를 시작했다. 한국·일본 프로골프에 이어 1999년 미국프로골프(PGA)에 한국 남자 골퍼 최초로 진출했다. 2002년 컴팩 클래식에서 우승한 뒤 메모리얼 챔피언십, 플레이어스챔피언십 등 PGA투어 8승을 달성했다. 지난 5월 KPGA투어 SK텔레콤 오픈에서 최고령으로 우승한 데 이어 PGA 투어 더 시니어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2025년 디 오픈 출전권을 따냈다.



[김윤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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