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윤석열 대통령(오른쪽)과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 나선 한동훈 후보가 인천 남동체육관에서 열린 한국자유총연맹 창립 제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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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공’(空)입니다. 사람들은 비가 내리고 구름이 떠다닌다고 생각하지만, 물방울이 떨어져 내릴 때 ‘비’라고 부르고 물방울이 공기 중에 떠다니니까 ‘구름’이라 부르는 거죠. 공을 ‘허무’로 오해하는 일이 많은데, 불교의 연기설은 실체 중심이 아니라 관계 중심으로 세계가 이뤄져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지난 10월2일치 경향신문 21면에 이영경 기자가 쓴 이중표 전남대 명예교수 ‘불경’ 출간 기사 마지막 대목입니다. ‘붓다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이중표 교수의 답변입니다.
연기설(緣起說)은 불가의 우주론입니다. 만물의 인과 관계와 상호 의존성을 강조하는 세계관입니다. 정치에서도 연기설은 유효합니다. 인물 중심이 아니라 관계 중심으로 해석할 때 이해하기가 더 쉽습니다. 정치인들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곧 그 정치인의 실체나 다름이 없습니다. 박정희와 김영삼, 박정희와 김대중, 김영삼과 김대중은 제각각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최근 정가의 중심 화두 가운데 하나는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관계입니다.
한몸이었다 갈라서면 더 참혹해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월24일 한동훈 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지도부와 만찬을 함께했습니다. 한동훈 대표가 공개적으로 요구한 ‘독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한동훈 대표가 홍철호 정무수석에게 독대를 다시 요청했지만, 지금까지 독대는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9월30일 한동훈 대표는 어느 언론사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30분 전에 취소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오는 자리였습니다. 10월2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원내대표단, 상임위원장, 상임위 간사들을 용산으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했습니다. 한동훈 대표는 부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대통령실 행정관 출신 김대남 서울보증보험 감사가 7·23 전당대회를 앞두고 한 인터넷 언론에 “너희가 잘 기획해서 한동훈을 치면 김건희 여사가 좋아할 것”이라고 말한 ‘공격 사주’ 사건까지 터졌습니다. 한동훈 대표는 당 윤리위원회를 소집해 진상조사를 할 예정이었지만 김대남씨가 탈당하자 당 차원의 고소·고발을 검토 중입니다. 한마디로 점입가경입니다.
10월3일치 신문 1면에 이런 제목의 기사들이 실렸습니다.
“한, ‘공격 사주’ 김대남 감찰 지시…윤-한 갈등 격화”(동아일보)
“한동훈 ‘김대남 의혹’ 조사 지시…특검 재표결 앞, 윤·한 갈등 증폭”(중앙일보)
“만찬 패싱·공격 사주 의혹…윤-한 갈등 고조”(한겨레)
조선일보 사설 제목은 “당 대표만 빠진 대통령·여 간부 회동”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어디까지 갈까요? 화해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고요? 두 사람은 본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본래 하나였던 존재가 갈라지면 훨씬 더 적대적인 관계로 치닫습니다. 형제의 난이 더 참혹하고, 친구가 철천지원수가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내전이 더 잔인합니다. 오죽하면 골육상쟁이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바로 그랬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1951년 육군사관학교 정규 1기(11기) 동기생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대구공립공업학교(현 대구공고) 동문이지만 공업학교 시절에는 몰랐다고 합니다. 전두환이 나이보다 훨씬 늦게 입학했기 때문입니다. 노태우는 1948년 대구공립공업학교에서 경북중학교로 편입했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학도병으로 헌병이 됐다가 1951년 육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전체 석차 10위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이었습니다.
전두환은 1951년 육군종합학교 보병 간부후보생에 합격했지만, 어머니가 합격증을 태워버리는 바람에 입대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 육사 시험에 응시했는데, 예비 합격자를 포함해 228명 가운데 끝에서 두번째로 합격했습니다. 만약 전두환의 어머니가 육군종합학교 합격증을 태워버리지 않았다면 전두환과 노태우는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향이 같은 두 사람은 생도 시절부터 각별하게 지냈습니다. 영남 출신들을 중심으로 ‘오성그룹’이라는 친목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전두환은 용성(勇星), 노태우는 관성(冠星)이었다고 합니다. 오성그룹은 뒷날 하나회로 발전했습니다.
하나회는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하에 군내에서 승승장구했습니다. 10·26이 터지자 12·12 쿠데타와 5·18 광주 학살로 정권을 찬탈했습니다. 육사 동기였던 두 사람은 쿠데타까지 함께한 것입니다. 언제나 전두환이 한발 앞이었습니다. 전두환은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 경호실 작전차장보, 보안사령관, 민정당 총재, 대통령까지 다섯차례 “나의 자리를 물려주었다”고 회고록에 썼습니다.
파격 발탁에서 파국적 홀로서기로
두 사람이 갈라서기 시작한 것은 노태우가 대통령이 된 뒤였습니다. 군부와 정권 내부 기반이 약했던 노태우는 전두환을 견제했습니다. 국민의 ‘5공 청산’ 요구가 쏟아지자 노태우는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냈습니다. 전두환은 2년이 넘게 백담사에 살면서 노태우에게 이를 갈았습니다.
노태우가 대통령에서 물러나고 1년이 지난 뒤 1994년 6월 두 사람은 점심을 함께하며 화해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서운함과 배신감이라는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 지시로 5·18 특별법이 제정됐습니다. 죄수복을 입은 두 사람은 법정에 나란히 서서 재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화해하지 못했습니다.
1996년 8월26일 법정에서 전두환 노태우씨가 나란히 서서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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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병상에 있던 노태우를 전두환이 찾아갔습니다. 전두환은 “이 사람아, 나를 알아보시겠는가?”라고 물었고, 노태우는 눈을 깜빡였습니다.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2021년 10월과 11월 한달 간격으로 별세했습니다.
윤석열과 한동훈은 검찰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2003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한나라당 차떼기 사건을 수사할 때였습니다. 검사로서 서로를 높이 평가하고 곧 가까운 사이가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무척 대조적인 성격과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었습니다.
1973년생 한동훈은 현대고, 서울법대를 다닌 이른바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였습니다. 대학 재학 중 1995년 22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했습니다. 1960년생 윤석열은 충암고, 서울법대를 다녔지만, 술을 좋아하고 ‘한량기’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법시험에 아홉차례 도전 끝에 1991년 31살에 겨우 합격했습니다. 만약 윤석열이 사법시험을 중도에 포기했다면 윤석열과 한동훈은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만남도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윤석열은 52살에 김건희와 결혼했습니다. 김건희는 양평 출신 최은순의 딸이었습니다. 최은순은 통장잔고증명서 위조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법정구속 됐다가 가석방으로 풀려났습니다.
한동훈은 29살에 진은정과 결혼했습니다. 진은정은 서울법대를 나온 김앤장 변호사입니다. 진형구 전 고검장의 딸로 미국 변호사 자격을 가졌습니다. 한동훈 부부가 윤석열 부부를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문재인 정부에서 윤석열은 서울중앙지검장, 검찰총장으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때마다 한동훈을 최측근 주요 보직에 발탁했습니다. 한동훈은 ‘윤석열 사단’의 핵심 전력이었습니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문재인 정권과 충돌하면서 한동훈은 좌천되어 한직을 맴돌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윤석열 당선자는 2022년 4월13일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한동훈 법무연수원 부원장을 지명했습니다. 파격이었습니다. 4·10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으로 다시 발탁했습니다.
거기까지였습니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입니다. 사람의 관계도 그런 것 같습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윤석열 대통령의 ‘역린’인 김건희 여사를 건드리자 두 사람 사이는 급속히 악화했습니다.
총선 패배 책임론을 둘러싸고 신경전까지 벌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7·23 전당대회에서 한동훈 대표가 선출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최근 두 사람 사이는 거의 최악으로 치닫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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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멸감 감추지 않은 막말 공방
9월24일 ‘빈손 만찬’ 뒤 26일치 동아일보는 친한동훈계 의원의 “윤 구중궁궐에”, 대통령실 관계자의 “한 속 좁고 교활”이라는 발언을 1면 기사 제목으로 뽑았습니다. ‘교활’은 여야 간에도 사용하지 않는 거친 표현입니다. 친윤석열계와 친한동훈계 인사들의 발언 강도가 점점 세지면서 감정 대립으로 번지는 양상입니다.
“(한동훈은) 한심한 자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 리더로서 자질이 없다. 인간적인 신뢰를 저버렸다. 대통령을 ‘그 사람’이라고 칭하더라.”(친윤)
“의-정 갈등은 대통령이 고집을 꺾어야 한다. 사고가 좀 나고 논란이 되면 고집을 꺾지 않을까? 정기국회가 끝나면 대통령의 시간이 끝나고 한동훈 대표의 시간이 올 것이다.”(친한)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갈 데까지 간 것 아닐까요?
마무리하겠습니다. 4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건희 특검법, 채 상병 특검법, 지역화폐법 재의결 무기명 투표를 했습니다. 부결됐습니다. 야당은 곧 법안을 다시 발의할 것입니다. 국민의힘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8표 이상 이탈표가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거부권이 무력화되면 윤석열 대통령은 레임덕을 맞게 됩니다. 정권이 사실상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태를 피하려면 두 사람이 화해해야 합니다. 화해하지 못하면 공멸합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이 한동훈 대표에게 역할과 활동 공간을 마련해줘야 합니다. 그게 국정을 안정시키는 길입니다. 국민이 좀 편안해지는 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과연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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