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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4 (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어떻게 세상에 기록되는가 [청계천 옆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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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진 No.81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을 골라 오늘의 시각에서 의미를 찾아보는 백년 사진입니다. 오늘은 흰 수염에 갓을 쓴 노인의 얼굴 사진을 골라봤습니다.

원래 계획은 아래 군밤 파는 소년의 사진(1924년 9월 30일자)과 그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간식과 군것질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피려 했는데 이 노인의 이야기가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주제를 바꾸었습니다.

동아일보

◇군밤사려… 세월은 쉬웁다. 길거리에 주렴 느린 어름가게에서 서늘한 광고를 보고 펄펄 끓는 더위를 조금이라도 물리쳐보려고 들어가든 일이 어제 같은데 어느덧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다. 길거리에는 혹은 어른, 혹은 아이가 설설히 끄럿소 군밤사려 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 이렇게 철은 쉬지 않고 가는 속에 어린이는 어른으로 어른은 늙은이가 되고 만다. 광음(光陰이) 화살과 같다는 말은 이를 이름인가. 무지하고 어린 사람들의 무심히 부르는 군밤 사려 소리 속에 인생의 비애와 세월의 공도가 포함되였다.  1924년 9월 30일자 동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24년 10월 2일자에 실린 사진입니다.

동아일보

전봉현 노인. 1924년 10월 2일자 동아일보


입을 꼭 다문 채 정면을 응시하는 노인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흑백의 흐릿한 사진이지만 짙은 눈썹과 매서운 눈매가 보입니다. 고집이 세다고 할까요 아니면 결의에 찬 모습이라고 할까요?

기사를 살펴보겠습니다.

교육계 독지(篤志) 전봉현 노인

수만원 토지를 정주 오산학교에

평북 선천읍내 사는 전봉현(田鳳顯)씨는 현재 85세의 노령으로 젊어서부터 근검저축으로 전전푼푼이 모아 지금은 유복한 생활을 하는 노인인데 다른 일에는 비상히 검소한 노인이나 오직 장래 청년 자제 교육에는 큰 뜻을 두고 정주 오산학교(定州 五山學校)에 1만7천여원 어치 토지와 선천군 남면 삼성동에 있는 밭을 전부 기부하였으므로 일반의 칭송이 많다더라 (사진은 전봉현씨)

-1924년 10월 2일자 동아일보


● 전봉현, 오산학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다

전봉현 선생에 대한 기록은 그 이전에도 신문에 등장합니다. 1924년 5월 20일자 기사에는 그가 오산학교에 1만 5천여 원 상당의 토지와 재산을 기부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는 오산학교와 같은 민족 학교의 재정적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한 고귀한 행위로 당시 사회에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1만 5천원이면 어느 정도의 돈이 될까요? 당시 냉면 한 그릇에 20전이었다고 하니 냉면 7만5천 그릇의 가격으로 계산하면 약 8억원 정도의 돈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그 이후에도 신문에서 등장합니다. 전봉현 선생의 이름은 1929년 5월 2일 기사에 등장하는데 오산학교의 교사 신축 및 학교 확대를 위해 1천 5백 원을 추가로 기부한다는 기록입니다. 기부를 한 이사들의 명단 제일 앞에 그의 이름이 있습니다.

五山高普擴充

崔昌學氏五萬圓寄附

리사측에서도 근 만원 기부

평븍정주(平北定州) 오산고등보통학교(五山高普)는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리승훈(李昇薰)씨의 노력으로 설립되어 조선사회에 많은 일꾼을 내보냈고 연 전에 30만원의 재단이 성립되며 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어 금년까지 제 2회 졸업생까지 내었는데 저간 교사 신축 등 학교 확대비로 결국 오만원의 부채를 보게 되어 그사이 만흔 곤난을 격거 오든바 이번 평븍 귀성에 잇는 삼성광업소(三成鑛業所) 주인 최창학(崔昌學)씨가 오만원을 기부하여 채무를 청장하는 동시에 동학교 이사들도 아래와 같이 기부금을 다시금 지출하여 경상비(經常費)에도 유감이 없게 되어 (校運)은 더욱 륭륭하게 되엇다더라.

◇理事寄附

▲田鳳現一千五百圓▲吳熙源一千五百圓▲李鏡麟一千五百圓▲吳致殷一千五百圓▲全起鴻一千五百圓▲趙始淵五百圓▲承啓漣三百圓

-1929년 5월 2일자 동아일보


● 민족을 위한 헌신의 발자취

그러나 그 역시 어려움을 당한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6년 4월 30일에 전봉현 선생의 집에 강도가 침입하여 십여 원을 강탈해 도망친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선천군 선천면 천남동(宣川郡 宣川面 川南洞)에 사는 부호 전봉현(田鳳賢)씨 집에 지난28일 새벽 한시경 에 돌연히 강도 2명이 담을 넘어 들어와서 돈을 내라고 강청하다가 아침 집에 있는 돈이 십여 원에 불과함으로 있는 데로 모두 빼앗어 가지고 어데로 도방하여 버리었다는데 이 사실을 안 선천 경찰서에서는 사방으로 비상을 늘리고 범인 체포 (선천)

-1926년 4월 30일자 동아일보


●사진에 담긴 노블레스 오블리주

강도를 당한 전봉현 씨의 한자는 어질 현(賢)을 쓰고, 기탁을 했던 전봉현 씨의 한자는 나타날 현(顯)을 쓰고 있습니다. 혹시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 식자공들이 일일이 한자를 넣던 시절이라 오타가 많았고, 사건 직후 신문에 실릴 만큼 유명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동일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기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남편의 뜻을 아내가 이어 기부를 계속 하였다고 합니다. 고인이 되신 전봉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아내인 이용상 여사가 안악고보 설립을 위해 1만원을 기부했다는 뉴스입니다. 1936년도 2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실렸습니다.

부군(夫君)의 유지(遺志) 이어
만원 기부
고 전봉현씨 부인 이용상 여사

이번 안악고보 설립 기성에 있어서 특히 일반 인사를 감격시킨 것은 이용상(李龍祥) 여사의 1만원과 유형내 여사의 50원 히사라고 한다. 이용상 여사는 일직 그 남편되는 전봉현(全鳳賢)씨가 재세(在世)중에 황해도 각처에 신교육 운동을 일으키어 발분망식하든 유지(遺志)를 받드러 이번에 안악고보 설립 운동을 보고 돌아간 남편의 펴다 못 편 뜻을 이으려 힘자라는데까지 재산을 제공한 것이며 유형내 여사는 어린아들을 데리고 홀로 지내는 터로 가세도 넉넉지 못하여 50원의 부담도 그 형편으로는 적지 않은 짐이건만 ‘과부의 한 푼’을 보탠다는 그 성심에 일반 인사를 감격케 한 것이라 한다.

-1936년 2월 12일자 동아일보


1920년대 신문에는 전봉현 선생 이외에도 많은 기부자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인창의숙(현 인창고) 설립자 성암 손창원은 30만원을 기부했고(1924년 3월 5일자 매일신보),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강택진은 자기가 갖고 있던 땅을 소작인에게 기부하고 아이스크림 장사를 시작(1923년 6월 26일자 동아일보)했습니다.

큰 돈을 내놓지 못하는 서민들도 민족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십시일반 돈을 내는 캠페인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1924년 6월에서 8월까지만 예를 들면, 간도 용정촌 동흥중학교 설립을 위한 기부금 모집을 위해 모집원들이 충남 당진과 예산에서 황윤수 김창학 1원부터 유진영 안덕수 100원까지 돈을 모금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모집원들은 충남 뿐만 아니라 경북 영주 등에도 내려가 기부를 받았고 신문은 그들의 이름을 지면에 실었습니다. 어떤 날에는 150명의 기부자 이름을 일일이 한자와 함께 지면에 남겨 놓았습니다. 그 명단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우리가 큰 역사와 큰 인물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이분들에 대한 기록도 온전히 복원시켜 후손들이 자랑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가능하면 그들의 얼굴 사진도 한 장씩 다 넣어서 말입니다. 오늘은 100년 전 자신의 재산을 민족 학교 운영을 위해 기부한 전봉현 선생의 사진을 통해,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비록 해상도 낮은 흑백 사진이지만, 사진이 남아있어 그의 고결한 뜻과 헌신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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