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국정난맥 불러 국민에 치명적 위해
망상·경각심 구별해 신중 기해야
정치인은 영웅과 역적을 가르는 담장 위를 위태롭게 걷는다. 정치인의 권한과 영향력이 큰 만큼 잘 하면 사람과 사회를 살리는 영웅으로 칭송받지만, 자칫하면 역적으로 전락해 역사에 오점을 남긴다. 특히 전쟁, 쿠데타, 계엄, 테러 등 폭력을 수반하며 국민의 안위와 국가의 명운을 순식간에 결정짓는 중대한 이슈의 경우 정치인은 관여해 영웅이 되거나, 반대로 역적이 되기 쉽다. 공명심이나 야심에 들뜬 정치인일수록 영웅이 되고자 무리하다 오히려 역적으로 몰려 망하는 도박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김민석 의원이 “현 정부가 정권 교체를 막기 위해 쿠데타적 계엄이나 테러 유혹을 느끼고 있다”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평범한 의원이 아니라 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의 최고위원이다. 차기 대통령직을 노리는 이재명 대표의 측근이기도 하다. 정치적 위상이 높은 김 의원이 거듭 짚은 민감한 사안이므로 진부한 일상적 정쟁의 한 예만은 아닌 것 같다. 정치적 계산이 빠른 그가 명확한 근거 없이 엄청난 파급력의 의혹을 제기하는 데 따르는 부담을 모를까? 역적으로 몰릴 위험성보다 영웅이 될 경우의 공이 더 크다고 판단했을까?
정말 정부가 정권 유지를 위해 명분 없는 계엄령을 선포하려 한다면, 이를 경고·비판하는 정치인은 영웅 대접받아 마땅하다. 실제 계엄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 기미를 널리 알린다면 예방 효과를 내는 것이므로 칭찬받아야 한다. 물론 사회 일각에서는 김 의원이 이 대표의 신뢰를 얻고 당내 입지를 굳히고 자신의 국민적 인지도를 높이려는 의도로 폭발성 강한 카드를 흔들어댄다고 의심한다. 김 의원의 진짜 의도는 알 길 없고, 설혹 그런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불순한 계엄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했다면 큰 공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려면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대통령 측근 중 특정 성향의 사람들이 회합을 가졌다”, “핵심 권력자는 위기 상황에서 돌발 행동을 취할 개연성이 있다” 등 어렴풋한 추측만으로는 안 된다. 제보자 보호를 위해 자료를 제시하지 않겠다는 공허한 핑계로도 안 된다. 구체적 증거 없이 외쳐대면, 계엄이나 테러처럼 위중한 사안이라도 억측, 심지어 유언비어라고 무시될 수밖에 없다. 정말 예방 효과를 냈는지도 알 수 없으니 그런 주장으로 영웅을 자처할 순 없다. 당내 단합을 다지고 반대편에 대한 증오심을 강화하는 데 공헌해 정파적 입지를 높일 순 있겠으나, 국민을 위한 영웅은 될 수 없다.
근거 없는 경고의 남발은 오히려 국민에 해를 끼친다. 우선, 양치기 소년의 우화처럼 사람들을 모든 경고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나중에 정말 어떤 일이 벌어져 경고를 해도 경각심을 잃은 국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더욱이, 계엄과 같은 사안의 무분별한 경고는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뿐 아니라 정부와 정치권 전체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 국정 난맥을 악화시킨다. 또한, 헌법에 대한 무조건의 불신을 퍼뜨린다. 계엄령은 되도록 발동하지 말아야 하나 꼭 필요한 최소의 경우엔 사용할 수 있도록 헌법에 규정된 비상책이다. 이런 헌법 제도를 증거도 없이 자꾸 의혹의 대상에 올리면 제도 그 자체와 헌법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정치인이 반대편을 증오하면 사이비 독심술사처럼 엉뚱한 망상을 하며 경솔해지기 쉽다. 이전 정권에서 여권이 ‘적폐 청산’의 기치로 야권을 억누르던 당시, 야권에서는 여권이 선거 패배로 정권을 잃지 않으려고 북한 카드나 개헌 등 비정상적 수단을 동원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퍼졌었다. 여야가 뒤바뀐 현 정권에서는 쿠데타 우려가 아예 노골적으로 제기됐다. 정치인들은 영웅과 역적이 한 끗 차라는 점을 되새기며 제발 신중해져야 한다.
[이투데이 (opinion@e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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