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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목)

선출되지 않은 ‘김건희’에 공적 지위까지? “역할 제한해야” 반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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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건희 여사가 지난달 10일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을 맞아 서울 마포대교에서 마포경찰서 용강지구대 근무자와 함께 도보 순찰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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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대 국회에서 법안명에 ‘김건희’라는 이름이 들어간 법안은 12건이다. ‘김건희’를 제안 이유로 개정안이 발의된 것까지 합하면 21건에 이른다. 수사 관련 법안들이다.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는 대선 전부터 논문표절·학력위조·주가조작 등 개인신상 관련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 부인이 된 뒤로는 의혹의 ‘스케일’이 달라졌다. 관저 이전·고속도로 종점 변경·채 상병 사건·국민의힘 공천 개입 의혹, 청탁성 명품가방 수수, 국외순방에 민간인 동행 등 대통령 남편 지위에 기대 권력남용과 국정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혹이 잇달았다. 권한과 전문성 없는 북한 관련 문제에 목소리를 내거나, 제복 공무원 등에게 지시하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과거에도 대통령 배우자 관련 논란이 있었지만, 양과 질에서 비교 자체가 어렵다. ‘영부남 윤석열, 대통령 김건희’ ‘국민은 김건희를 뽑지 않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대통령실은 “김건희 여사를 악마화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김 여사를 수사해야 한다는 의견이 65%에 달했다.



윤석열 정부 들어 대통령 부인의 국정 개입 의혹 등이 쏟아지자, 정치권과 법학계에선 대통령 배우자의 지위와 역할을 법으로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윤 대통령이 김건희 특검법 거부권을 다시 행사한 2일 오전, 개혁신당은 4·10 총선 때 공약했던 대통령 배우자 지위 법제화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개혁신당이 ‘김건희법’으로 명명한 법안은 △대통령 배우자의 공적 역할 정의 △대통령 배우자에게 투입되는 예산의 투명성 확보 △대통령 배우자의 법적 책임 강화 등을 뼈대로 한다. 허은아 개혁신당 대표는 “대통령 배우자의 법적 지위가 법률상에 단 한 줄도 명확히 규정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 배우자가 공적 권한을 남용하는 일은 어쩌면 예견된 결과다. 대통령 배우자법은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김건희법은 자칫 선출되지 않은 민간인에게 공적 지위와 예산을 법으로 ‘보장’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어 법 제정에 신중해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법 테두리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주거나, 자의적 해석으로 법이 정한 경계를 넘어서는 일도 가능하다.





한국, 김건희 여사가 불을 지르다





대통령 배우자 관련 현행법은 경호와 예우에 관한 두 가지뿐이다.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은 현직·전직 대통령에 대한 경호·예우를 규정하면서, 그 대상에 배우자를 단순히 포함하는 식이다. 그렇지만 대통령 배우자는 경호·의전을 넘어선 공적 지위와 역할을 맡는 것이 현실이다.







“대통령 배우자는 선거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헌법이나 법률에 아무런 행동규약이 제시되어 있지 않으며, 탄핵이나 파면조항의 대상자에 해당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다만 대통령과 결혼한 사실에 의해 퍼스트레이디 또는 퍼스트젠틀맨이라는 지위를 얻는 존재이다. 대통령 배우자의 활동 기간은 대통령의 임기와 동일하다…대통령 배우자는 선거 과정에서 대통령과 함께 나란히 투표용지에 씌어 있지 않다. 그리고 헌법을 비롯한 관련 법률에 규정된 법적 권한이나 부여된 역할이나 임무도 없고, 급여도 없다. 공식적으로 선출된 선거직 공무원에게 부여되는 책임으로부터도 벗어나 있다. 국가수반의 부인으로서 의전과 예우, 경호만 존재한다. 대통령 배우자는 대통령에 대한 제1의 조언자로서 정책형성과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훌륭한 외교관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외교에 참여할 권리도 없는 대통령 경호처의 단순 경호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동행하며 국가 공식 행사에 참석하고, 대통령을 대신하여 외교 사절로 활동하며, 국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등과 함께 각종 사업을 진행하거나 행사를 주최하기도 한다. 또한 관행적으로 대통령 배우자의 관심사에 따라 여성·아동·장애인 등을 위한 대외사업을 진행하며 대통령 직무를 직·간접적으로 돕고 있다.”(이철호 ‘대통령 배우자의 법적 지위’)





이런 모호한 지위를 갖는 대통령 배우자 관련 업무를 담당해온 곳이 ‘제2부속실’이다. 제2부속실은 박정희 대통령 때인 1972년 만들어졌다. 법이 아닌 대통령비서실 직제(대통령령)로 운영됐는데, ‘작은 대통령실’을 공약했던 윤 대통령은 당선 뒤 제2부속실을 폐지했다. 대선 전 불거졌던 김건희 여사 관련 각종 의혹·논란을 염두에 뒀다면 폐지보다는 유지·강화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간 여러 구설에 오른 김 여사의 공식·비공식 일정, 화보를 방불케 하는 사진, 권한을 넘어선 메시지, 의상 등을 담당하는 비서실 조직은 없었다. ‘여사 라인’이 비서실에 채용돼 김 여사를 보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퍼스트레이디를 ‘발명’하다





미국 역시 ‘퍼스트레이디’ 지위와 역할을 두고 논란이 없지 않지만, 비교적 법 테두리 안으로 대통령 배우자를 끌어들였다고 평가된다. 그 과정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으로 정치인이자 인권·사회운동가였던 엘리너 루스벨트 등이 긍정적 의미의 ‘대통령 배우자 전통’을 세우고 이어갔다.



1978년 미국연방법에 ‘대통령이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수행할 때 배우자가 이를 지원하는 경우 대통령에게 승인된 지원을 배우자에게도 제공할 수 있다’는 내용이 신설됐다. 연방항소법원은 빌 클린턴 대통령 때인 1993년, 남편 못지않은 정치력과 영향력을 행사했던 부인 힐러리 클린턴 관련 소송에서 ‘사실상 퍼스트레이디는 정규직 연방 직원’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이를 근거로 미국 대통령 배우자에게는 “포괄적이고 탄력적인 지원”(이철호)이 이뤄진다. ‘퍼스트레이디’ 집무실은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백악관 웨스트윙 맞은편 이스트윙에 있다. 공보담당 비서 등도 따로 있다.



질 바이든은 지난 7월 조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 불출마 결정에 가장 결정적 조언을 한 ‘최측근 참모’였다. 백악관 홈페이지를 보면, 조 바이든 대통령과 별개로 ‘질 바이든 여사 국빈만찬 주재’ 등 브리핑도 수시로 한다. 질 바이든을 소개하는 코너도 있다. 질 바이든의 경력과 관심사, 공적 역할과 기여 등을 텍스트, 사진, 영상 등을 통해 자세히 소개한다.







“대통령 부인으로서 바이든 박사는 모든 미국인에게 다가가 우리나라를 하나로 모으는 데 주력해 왔다. 군인 가족 지원, 교육 기회 증가, 암 종식 노력, 여성 건강 연구 지원 방식 발전 등이다. 행정부의 가장 시급한 우선순위에 대한 주요 메신저 역할을 했다. 팬데믹 폐쇄 이후 학교의 안전한 재개, 백신 접종 촉구, 대통령의 경제적 의제 지원, 미국의 세계 관계 회복을 도왔다. 바이든 박사는 영부인 역할을 봉사 행위로 보고, 백악관의 벽 너머로 다가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백악관 홈페이지)





대신 높은 수준의 투명성을 요구받는다. 미국 대통령 부인의 공식 일정은 사전에 공개되고 동행자 명단 역시 공개된다. 언론 접근도 충분히 보장된다. 혹시 있을지 모를 권력남용을 견제하기 위한 조처다. 김건희 여사처럼 해외 순방에 자신과 친한 민간인을 몰래 동행하는 일 등은 발생하기 어려운 제도적 구조를 갖춘 셈이다.









프랑스, 미국 따라 하다 국론 분열





대통령제가 반영된 이원집정부제인 프랑스에서도 한국처럼 대통령 배우자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한 법률이 없다.



지난 5월 김건희 여사 논란을 계기로 작성된 국회 입법조사처 이슈보고서(프랑스 대통령 배우자의 법적 지위)를 보면, 프랑스에서는 대통령 배우자 활동·지원되는 보좌 인력·비서실 규모·지원 예산·지출 공개 여부 등을 두고 정권마다 논란이 있었다. 2009년부터 프랑스 감사원이 엘리제궁(대통령실) 회계보고서를 발행하고 있지만, 대통령 배우자 관련 지출은 부분 공개만 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배우자 지위에 국민적 관심의 불을 지른 것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었다. 마크롱은 대선에서 공약한 대로 아내 브리지트 마크롱의 공식 역할을 명확히 하겠다며 미국식 퍼스트레이디 지위를 부여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2017년 8월 ‘국가원수 배우자의 지위에 관한 투명성 헌장’을 발표했는데 △국제회의 동행 △국민과의 소통 △엘리제궁 행사 감독 등 공적 역할과 사명을 규정했다. 비서관 2명 배정 등 비서실을 두지만, 배우자 지위나 그에 따른 활동에 대해서는 보수나 별도 예산을 책정하지 않기로 했다. 대통령실 예산에 포함된 배우자 지원 예산은 감사원 통제·감독을 받도록 하고, 매달 브리지트 마크롱 활동 내용을 공개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국회 입법조사처는 “프랑스 최초로 대통령 배우자의 역할과 지원 방식을 규정한 문건이지만, 법령이 아닌 헌장 형태여서 법규로서 효력이나 차기 정권에 대한 구속력은 없었다”고 했다. 이는 선출되지 않은 대통령 배우자에게 공식 지위를 부여하고 국가 예산을 배정하겠다는 계획에 대한 반대 여론이 컸기 때문이다. 당시 온라인 반대 청원에 30만명이 참여했다.



프랑스 야당은 대통령 배우자가 관저와 경호 외에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게 하는 수정안을 내기도 했다. △투명성 보장보다 대통령 배우자 역할을 배제하는 것이 중요하며 △미국의 발명품일 뿐인 퍼스트레이디를 따라 해 선출되지 않은 사람이 국민을 대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여당은 △대통령 배우자 지원은 (역할 배제가 아닌) 투명성 보장 차원에서 다뤄져야 하며 △대통령 공적 역할에서 가족인 배우자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맞섰다. 마크롱 대통령의 ‘배우자 투명성 헌장’은 최고행정법원인 국사원까지 간 끝에 효력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그 위상은 크게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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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1일 성남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76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윤 대통령 의자의 빗물을 닦아 주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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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희법 제정될까





윤석열 대통령은 김 여사 논란이 계속되자 임기 절반을 코앞에 둔 시점에야 제2부속실을 다시 설치하겠다고 했다. 용산 대통령실은 구체적인 운영 시기는 못 박지 않은 채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이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정치권에선 김 여사의 ‘광폭 의혹’에 비춰볼 때 제2부속실 복원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윤 대통령이 “여야 합의 추천”을 되뇌는 특별감찰관 임명 등 김 여사와 친인척에 대한 감찰 기능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건희법 역시 대통령 배우자의 지위·역할·관리·감독의 종합적 틀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 오랜 시간 대통령 배우자의 지위와 역할, 수용 가능한 범위를 제도적·관습적으로 다듬어 온 미국 상황을 섣불리 차용하려다 정치·사회적 논란만 키운 프랑스 꼴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이슈보고서에서 “대통령 배우자 지위를 법규로 규정하면 국정운영에 과도한 영향력 행사 우려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지만, 선출되지 않은 배우자에게 공직자의 책임과 의무를 부여해야 하는 딜레마가 발생한다”며 신중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지난해 한국법학회 학술지 ‘법학연구’에 실린 ‘대통령 배우자의 법적 지위’(이철호) 논문은 대통령 배우자의 역할·임무·예산지원 등을 법으로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면서 “대통령 배우자로서 이행해야 할 공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언급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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