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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목)

[정동칼럼]파국적 평형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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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100년 전인 1929년. 이탈리아 남부 작은 도시인 투리의 교도소에서 날카로운 눈매의 작은 남자가 추위로 곱은 손을 호호 불며 글을 쓰고 있었다. 이탈리아공산당 당수이자 하원의원이었던 안토니오 그람시다. 그는 광기의 파시즘과 무솔리니를 비판했다가 치외법권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에 의해 끌려온 것이다. 그는 결국 감옥에서 병사하고 말았지만, 그의 글은 현대사회를 이끄는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우파’들도 자주 사용하는 ‘시민사회’, ‘헤게모니’라는 개념이 바로 그가 이 교도소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도 모르는 ‘그람시주의자’들이다.

요즈음 한국정치를 보고 있자면 그람시가 자꾸 떠오른다. 그가 만든 또 다른 용어인 ‘파국적 평형상태(catastrophic equilibrium)’라는 개념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는 지배적 세력이 사회 전체에 대해 정치·도덕적 주도권(헤게모니)을 행사한다.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서로 대립하는 사회세력의 힘이 엇비슷해 어느 누구도 다른 세력과 사회 전체에 대해 헤게모니를 행사하지 못하고 둘 간의 평형상태가 오래 지속되면서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파국으로 달려가는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이 그람시가 말하는 파국적 평형상태다. 이 같은 상태는 결국 ‘로마민주주의’를 무릎 꿇리고 시저(카이사르)라는 독재자를 등장시킨 ‘케사리즘’, 프랑스혁명의 혼란 속에서 쿠데타라는 반혁명을 통해 독재자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의 ‘보나파르트주의’ 같은 비극으로 이르게 된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윤석열 정부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과 이재명 대표가 이끌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세력 간의 대립은 그람시가 이야기한 파국적 평형상태를 빼어 닮았다. 지난 대선에서 나타난 0.73%의 표차라는 것이 두 세력의 평형상태, 교착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윤석열 정부의 연이은 실정과 오만, 독선으로 인해 민주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뒤에 나타나고 있는 양측의 사생결단식 대립이다. 여러 인사와 정책들이 보여주듯이, 윤석열 대통령은 총선 참패에도 불구하고 전혀 자성이나 쇄신노력을 보이지 않은 채 막무가내식으로 자신의 극우노선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에 맞서 민주당은 여러 개혁진보 야당들과 함께 총선에서 차지한 압도적 의석에 기초해 방송4법, 노란봉투법, 채 상병 특검법 등 개혁적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한편 윤 대통령이 임명한 인사들에 대해 연이어 탄핵을 시도하고 있다. 자유주의세력의 이 같은 공세에 대해 윤 대통령은 유례없이 연이은 거부권 행사로 대응하고 있다.

문제는 민주당과 개혁진보 야당들이 국회의 절대의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국민의힘이 108석을 차지하고 있어 대통령의 거부권을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200석에는 못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민주당이 개혁법안을 통과시키면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윤 대통령이 무리한 인사를 하면 민주당이 이들에 대한 탄핵안을 발의하는 ‘거부권 대 탄핵’이라는 교착상태, 파국적 평형상태에 빠져 있다.

우리는 오랜 군사독재 때문에 쿠데타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이 매우 강하다. 따라서 교착상태가 장기화된다고 해서, 그람시의 우려처럼, 군이 다시 무기를 들고나와 곤봉 앞에 모든 세력을 무릎 꿇게 하는 케사리즘이나 보나파르티즘이 들어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걱정되는 것은 교착상태가 장기화되면서 양 진영의 대립이 ‘총만 들지 않은 내전상태’로 발전하고 일반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혐오감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아니 급기야 양자의 대립이 폭력적 사태로까지 나아가고 그 가운데 히틀러와 같은 극단적인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부상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정치적 대타협’ 같은 충격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국민들이 아무리 지겨워하더라도, 다음 대선이 있는 2027년 3월까지는 이 같은 교착상태가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조국 의원의 주장처럼 윤 대통령을 탄핵한다면 교착상태를 깰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 의석수 등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2년 반 이상 지금과 같은 교착상태가 계속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아니 대선에서 국민의힘이 다시 승리하는 경우, 교착상태가 대선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지금같이 짜증나고 소모적인 평형상태가 장기화되더라도, 사태가 쿠데타와 같은 ‘결정적인 파국’에는 이르지 않는 것만이라도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가? 답답한 일이다.

경향신문

손호철 서강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손호철 서강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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