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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목)

세상과 불화하며 화합, 가수 이승윤의 ‘너른 품’을 질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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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가수 이승윤이 첫 정규앨범 ‘폐허가 된다 해도’ 쇼케이스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쇼플레이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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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1일 토요일,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뜨거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만든 놈, 판 놈, 본 놈 모두 처벌해라!” 약 6천 명의 여성이 참여한 가운데, 대학생 연합단체인 ‘여성혐오폭력규탄공동행동’은 딥페이크 성착취물 사태 관련 가담자 처벌을 촉구했다. 2018년 불법촬영 문제를 규탄하는 ‘혜화역 시위'가 열린 뒤 6년 만이다. ‘불법촬영’에서 ‘딥페이크’로 범죄의 양상이 진화했을 뿐 상황은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었다. 여성을 무력하게, 하지만 동시에 강력하게도 만드는 이 사회 문제를 또 다시 겪으며, 피해를 입은 여성보다도 다수의 가해자와 같은 성별로 싸잡히는 것이 더 억울한 일부 남성을 보며, 가수 이승윤의 말을 떠올렸다.



“건강한 토론장을 만들기 위해선 몇 가지 사소한 것을 인정하는 게 선행돼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제가 아버지 성을 따서 이씨이듯, 기존의 인간 사회는 남자 위주로 설계가 돼 있었다는 거죠. 이것만 인정하고 시작해도 혐오로 가지 않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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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윤이 인류 최악의 발명품으로 “핵, 가부장제, 민트초코”를 꼽으며 부연한 답변이었다. 누구든 누구보다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기묘한 공정의 시대에, 기득권이 기득권이라는 최소한의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면 거기서 어떤 논의도 이어갈 수 없다. 나는 여성이지만 비장애인이고, 서울에 살고, 대학을 나왔고, 아파트에 산다. 계급성을 따지자면 기득권이자 주류라는 것을 인정한다.



여성 중에서도 자산과 직업, 학력과 거주지 등을 따지자면 주류이고 기득권에 속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남성 또한 젠더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계급성을 따지자면 약자인 남성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성이 젠더 권력을 지녔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떤 남성들은 성별 위계 구조에서 기득권이라 호명되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를 고통스러워한다.



나는 손해만 보고 살았는데, 왜 가해자라고 의심하는지 화부터 낸다. 어떤 정치인들은 그 억울함을 이용한다. 체제로 향해야 할 적대심을 그들보다 더 약자인 존재에게 보내라고 가리키며 ‘억울한 남성’을 자신들의 스피커로 쓴다. 그 결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기초생활수급자, 심지어 길고양이에게까지 굴절된 분노와 혐오가 쏟아진다.



가해자의 절대다수가 남성인 성범죄에서조차 억울함만을 앞세우며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피해자성’을 욕망하는 이 블랙코미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왜 그들은 인간이 복잡한 교차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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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승윤. 코스모폴리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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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윤과는 두 번 만났다. 첫 만남은 ‘싱어게인’(JTBC) 우승자로서 이제 막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시기였다. 그는 “마이너리티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메이저로 왔으니 혼란스러운 건 사실”이라고 말하며 “무명 가수가 ‘유명’해졌다는 말이 달갑지만은 않아요. 다른 쪽에 편입됐다고 해서 기존의 것을 내팽개치지 않고 계속 경계선에 있고 싶죠”라 덧붙였다. 그가 쓴 노래 ‘무명성 지구인’이나 ‘게인주의’의 가사를 보면 그가 계속 주시하는 건 ‘어둠 속에 묻힌 이름 없는 개인들’이었다.



“그건 제가 살아온 삶이기도 하고 제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기도 해요. 빛과 어둠,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으로 말하고 싶진 않아요. 전 뭔가를 단칼에 정의 내리거나 한마디로 퉁 치는 걸 싫어하거든요. 빛 안에서도 소외되는 사람이 있고, 어둠 안에서도 소외되는 사람이 있어요. 한두 문장으로 수렴되는 세계는 폭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 문장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분들과 함께 행복하고 싶고요.”



이것은 교차성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언어였다. 그런 그에게 “같이 (행복하고 싶나요)?”라고 되묻자 “네, 혼자 행복해서 뭐 합니까. 나중에 다 후회하던데”라는 답이 돌아왔다. 직접 쓴 노래 가사처럼 ‘별보단 별과 별 사이 어둠에서’처럼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는 이승윤. 그는 모든 규격과 전형성에서 벗어난 애매모호한 것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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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승윤. 코스모폴리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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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외되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포용력은 단언컨대 현 사회에 가장 필요한 미덕이다. 누구든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일 수 있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다. 사회문화적으로 기득권이지만 성소수자일 수 있고 남성이지만 장애인일 수 있으며 여성이지만 유산계급일 수 있다. 나아가 이분법으로 모든 것을 가를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인간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간성일 수도 있다. 이성애자도 동성애자도 아닌 양성애자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다 똑같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복잡한 교차성의 덧셈과 뺄셈 속에서 최소한의 인정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남성이라면 젠더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자신이 비장애인이라면, 이성애자라면, 그렇지 않은 이들이 싸워 투쟁해야 할 수많은 권리와 혜택을 당연하게 누리고 있음을.



이승윤의 ‘이도 저도 아님’, 그리고 교차성. 내가 질투하는 것은 세상과 불화하는 동시에 화합하는 스탠스다. ‘네모난 상자 안에 갇힌 동그란 마음’을 노래하는 이승윤은 자유만큼 책임도 강조했다.



“전 제가 정형화되고 규격화된 세상을 살고 있고 이 시대와 이 사회의 태도로 살아야 한다는 걸 인정한 다음 제가 찾을 수 있는 자유를 찾아요. 불평불만이 많아 살기 좀 불편하긴 한데 대외적으로는 적당히 잘 살려고 하죠. 규격을 벗어나는 사유들은 창작으로 해소하고요. 저는 음악하는 친구들에겐 이렇게 말해요. ‘헛짓거리 하지 말라’고. 창작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사회가 요구하는 보편적인 걸 해야 할 책임도 있어요.”



네모난 상자 안에 갇힌 동그란 마음. 어느 한구석에 발을 놓을 줄도 몰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 살아온 내가 보기에 ‘무명성 지구인’ 이승윤은 이 땅에 접붙이며 살아가는 요령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참으로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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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승윤. 코스모폴리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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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우리가 서로를 혐오하지 않을 전제 조건은 이승윤의 말처럼 ‘사실을 인정할 것’, ‘거기서부터 논의를 시작할 것’이다. ‘사실’과 ‘기분’을 구별할 줄 아는 그의 정확함, 그리고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않는 모호한 존재들을 삭제하지 않는 포용력. 우리가 공론장에 나설 때 갖춰야 할 두 가지다.



이승윤은 방송 ‘싱어게인’(JTBC), ‘불후의 명곡’(KBS2) 등에서 다른 노래를 커버할 때마다 가사의 ‘여자, 아가씨, 미녀’라는 표현을 ‘사람, 그대, 너’라는 성 중립적인 표현으로 바꾼 것에 대해 “어떤 것도 제한하고 싶지 않았고 마음을 넓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금 우리에겐 바로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정확해야 할 땐 정확하고, 포용할 땐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너른 품이.





▶‘이승윤이라는 이름’ 인터뷰 보러가기 (클릭!)



▶‘노래하는 보헤미안, 이승윤’ 인터뷰 보러가기 (클릭!)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은?



이예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을 질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부러운 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지요. 이예지 디렉터가 <GQ>, <아레나>, <씨네21> 등 4개 매체를 거치며 지금껏 만난 사람들의 면면 중에 가장 열렬히 질투했던 구석을 파고든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질투는 나의 힘'은 격주 수요일 낮 12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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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


이예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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