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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2 (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이진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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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8월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907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 관계자들이 기후정의행진 선포식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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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올 추석엔 잡채에 시금치를 못 넣었다. 손바닥만한 시금치 한단이 9980원이나 했기 때문이다. 시금치 대신 부추 넣은 잡채를 어머니께 갖다 드리며 “시금치가 상할까 봐 부추를 넣었다”고 한 건 소심한 거짓말이다. 대목이 지나고도 채소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기만 한다. 언론에서는 ‘배추 한포기 만원’이라고 하지만, 만원짜리 배추란 ‘875원짜리 대파’만큼이나 허구적이다. 겉껍데기 다 떼고 굵기가 고작 주먹만한 배추에 ‘알배기 배추’ ‘손질 배추’란 이름을 붙여놓고 판다. 이런 배추로 김치는 못 담근다.



이맘때 먹을 배추는 입추 지나고 8월 초·중순에 씨를 심는데, 8월 내내 이어진 폭염과 폭우로 농사가 거덜이 났다고 한다. 배추, 시금치뿐이랴. 1973년 전국 기상 관측 이후 평균기온이 가장 높고 열대야가 가장 길었던 여름으로 인해 폐사한 가축이 117만마리, 떼죽음당한 양식 어류가 2650만마리를 넘어섰다. 기후위기가 초래한 육해공 식량위기다. 기후위기는 북극곰이나 남태평양 작은 섬보다 훨씬 가까이, 훨씬 깊숙이, 훨씬 잔인한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경기도 이천에서는 배추 십여포기를 훔쳐 갔다고 이웃 간에 시비가 붙어 60대 남성이 사망했다. 배추는 금값이 되고 목숨은 똥값이 되었다. 전남 해남에서는 배추밭에서 일하던 타이 출신 50대 노동자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날 해남의 지면 온도는 43.9도, 42일째 폭염특보가 이어지던 중이었다. 에어컨이 없으면 밤잠을 이룰 수 없던 때, 에어컨 다는 일을 하다가 열사병으로 사람이 죽었다. 전남 장성의 한 학교 급식실에 에어컨을 달던 양준혁씨는 출근 이틀 차의 20대 청년이었다.



질병관리청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 5월20일부터 9월28일까지 온열질환자는 3696명인데 이 중 40%가 실내외 작업장에서 발생했다. 1500건에 이르는 작업장 피해 사례 가운데 산업재해는 67건에 불과하다. 산재가 되지 못한 노동 현장의 단순노무자들, 불법체류자들, 농어민들, 택배노동자들의 피해는 제대로 집계도 되지 못했을 터이다. 살아서도 큰 소리 한번 내지 못한 이들은 죽어서도 소리 없이 지워진다. 배추가 말라붙고 소와 돼지와 닭이 폐사한 땅 위에, 소리 없는 죽음들이 철 이른 여름 낙엽처럼 흩어져 부서진다. 참혹한 생명의 위기다.



기후위기는 인류 모두의 운명이지만 수난과 고통은 가장 낮은 곳부터, 가장 무고한 이들부터 엄습한다. 전 국립기상과학원장 조천호 박사가 ‘네이처 기후변화’ 저널 등을 인용해 분석한 바에 따르면, 기후위기는 세대별, 지역별, 계층별로 철저하게 차별적이다. 인류가 화석연료를 태워 배출한 이산화탄소 총량의 80%가 1960년 이후에 발생했는데, 그 온실가스의 3분의 1은 현재의 60대 이상이 배출해온 것이다. 1950년 출생자는 10년에 0.12도의 기온 상승을 경험했지만 1980년 출생자는 50%가 높은 0.19도를, 2020년 출생자는 3배나 더 높은 기온 상승을 마주할 것이라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만든 지구 온난화의 저주를 무고한 손주 세대가 떠안는 셈이다.



지역과 계층에 따른 기후불평등은 더 잔인하다. 세계 온실가스의 약 80%는 소득이 높은 20개국에서 발생한 것이다. 2020년 기준 중국이 1위, 미국이 2위, 한국도 10위에 해당한다. 기후위기의 원인 제공자들은 잘사는 나라, 잘사는 사람들인데 그 피해는 기후위기에 제일 책임이 덜한 나라와 하층계층부터 집어삼킨다.



1천만명이 넘게 사는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가 물에 잠기고 있다. 2050년이 되면 북부 자카르타의 95%가 지도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어 수도를 자카르타에서 보르네오로 옮기기로 했단다. 몰디브도, 베네치아도 침수 위기 지역이다. 서울과 수도권의 그 금쪽같은 땅들은 안전한가? 타이태닉호는 3등실부터 가라앉고, 수해는 지하 월세방부터 덮치고, 기후위기는 힘없는 사람들의 삶부터 짓밟는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더위를 피해 에어컨 빵빵한 대형마트에서 에코백에 텀블러나 들고 다니며 배추, 시금치 값에 분노하는 인생이 비루하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는 김수영 시인의 한탄이 폐부를 찌른다. 음탕한 왕궁은 흥청망청 힘없는 사람들의 생명과 미래를 소비하는데, 지금 필요한 건 혁명적 조치에 준하는 대대적 국가 개조인데, 정치가 아니면 이루지 못할 일인데… 시간이 맥없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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