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블록체인 스타트업 ‘핍랩스(PIP Labs)’가 올해 8월 말 투자 유치에 성공하며 책정받은 기업가치다. 한화로 약 3조원에 달하는 액수다. 2022년 6월 설립 이후, 불과 2년 만에 유니콘 반열에 올라섰다. 누적 투자 유치액은 1억4000만달러(약 1870억원)까지 늘었다.
투자에 참여한 이도 ‘빵빵’하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투자자가 대거 포진했다. 약 86조원 규모 자산을 운용하는 미국 최대 벤처캐피털(VC) 앤드리슨호로위츠(a16z)가 리드 투자사로 나섰다. 크립토 투자 전문 기업 폴리체인캐피탈을 비롯해 K11 창업자인 에이드리언 청, 메디치 가문 미술 컬렉터 코조모 데 메디치도 있다. 삼성 해외 투자 회사인 삼성넥스트와 방시혁 하이브 의장도 이전 라운드 투자자로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핍랩스를 창업한 이는 한국인 청년 기업가 이승윤 대표(34)다. 영미권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를 창업해 2021년 카카오에 5000억원에 매각한 이 대표가, 불과 2년 만에 연타석 홈런을 쳤다. 최근 생성형 인공지능(AI) 급부상으로 글로벌 화두가 된 ‘지식재산권(IP) 보호’를 블록체인 기술로 실현해내겠다는 포부에 글로벌 자본시장이 공감했다.
1990년생/ 옥스퍼드대 정치철학경제학부 졸업/ 2014년 바이라인 창업/ 2016년 래디쉬 창업, 2021년 카카오에 매각/ 2022년 핍랩스 대표(현) [일러스트 : 강유나] |
웹소설 5000억원 매각 ‘성공 신화’
콘텐츠 산업 한계 절감…답은 블록체인
이승윤 대표는 26세에 창업한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를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엔터)에 5000억원에 매각해 성공 신화를 쓴 인물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유학생 출신으로, 옥스퍼드대 유명 토론 클럽인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최초 아시아 출신 회장으로 당선되며 주목받은 바 있다.
첫 창업은 2014년 만든 저널리즘 스타트업 ‘바이라인’이다. 크라우드펀딩으로 뉴스를 제작하는 사업을 했지만 수익 창출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웹소설 플랫폼으로 피벗(비즈니스 모델을 바꾼 것)해 2016년 래디쉬를 창업했다. 지금은 익숙한 ‘미리보기 결제’라는 트렌드를 선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2021년 래디쉬 매각 후에는 카카오엔터에서 글로벌전략담당(GSO)으로 일하다가 2022년 퇴사해 IP 문제를 블록체인 기술로 해결하는 스타트업 핍랩스를 새롭게 차렸다.
핍랩스 창업 배경에는 이 대표가 그간 콘텐츠 업계에 몸담으면서 쌓은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래디쉬 운영 당시부터 콘텐츠 IP 산업의 한계를 절감했다. 콘텐츠 IP는 ‘영업 레버리지 효과’를 만들어내기 어려운 산업이다. 영업 레버리지 효과란 규모가 커질수록 인건비나 상각비 같은 고정비 투입 대비 영업이익이 더 크게 늘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초기에 어느 정도 사용자를 모으고 규모를 키워놓으면 알아서 수익이 늘어나는 여타 플랫폼과는 다르다. 새 콘텐츠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작동하는 구조다. 창작자에게 매번 추가 인건비와 제작비를 써야 하고 마케팅 비용도 계속 늘어난다. 넷플릭스나 디즈니 같은 초대형 콘텐츠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 대표의 고민이 이어지던 중 만난이가 공동 창업자인 제이슨 자오 최고프로토콜책임자(CPO)다. 알파고 개발사인 구글 ‘딥마인드’에서 스탠퍼드대 재학 당시 20세에 최연소 프로덕트 매니저로 근무했던 기술 전문가다. 제이슨 자오 CPO는 AI 기술 한계를 느끼고 있던 와중이었다. AI 학습 속도가 원체 빠르다보니, 그들이 학습해야 할 원천 자원인 ‘휴먼 데이터’가 빠르게 고갈되는 공유지의 비극이다.
핍랩스 관계자는 “아티스트 입장에선 AI가 학습할 1차 콘텐츠를 만들어낼 동기부여가 없다. 마음대로 가져다 학습을 하는데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수익을 낼 수도 없기 때문”이라며 “이대로라면 AI와 IP 시장 모두 공멸할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두 창업자가 의기투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IP 산업 특화된 ‘이더리움’이 목표
IP 창작자…학습·재창작 시 수익 배분
이 대표와 제이슨 자오 CPO가 구상한 해결책은 ‘블록체인’이다. 핍랩스가 만든 ‘스토리 프로토콜(이하 스토리)’은 IP에 최적화된 블록체인을 개발한다. ‘IP 산업에 특화된 이더리움’을 만든다고 보면 이해가 편하다.
위변조가 불가능하고 추적이 쉬운 블록체인을 콘텐츠 IP 산업에 접목하는 것이 핵심이다. 스토리 블록체인에 창작물 라이선스를 등록하면 손쉽게 소유권을 설정할 수 있다. 누군가 해당 IP를 활용할 경우 자동으로 이력이 남고 결제도 된다. 학습이든 재창작이든 따지지 않는다. 원작자 입장에서는 전에 없던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새 콘텐츠를 만들 동기부여가 더 강해진다. 일대일 거래 방식인 만큼, IP 협업 때 필요한 복잡한 중개 절차도 사라진다.
스토리가 직접 앱을 개발하는 건 아니다. 스마트폰 생태계에 비교하면 구글 안드로이드나 애플 iOS 같은 ‘운영체제(OS)’를 만든다고 보면 된다. 안드로이드 생태계에 카카오톡이나 쿠팡 같은 앱이 등장한 것처럼, 스토리 생태계 속에서 여러 개발사가 저마다 앱을 내놓는 방식이다. 웹툰, 애니메이션, 영상을 비롯해 패션, 음원 스트리밍, 명품 등 IP가 필수인 모든 영역에서 앱이 생겨날 수 있다. 등록한 IP를 담보로 대출이나 유동성을 제공하는 금융 서비스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스토리 베타 서비스가 출범한 지 아직 두 달 남짓이지만, 이미 2000만개 이상 IP가 등록돼 있다. 200개 이상 팀이 이를 활용해 다양한 비즈니스와 개발 협업을 진행한다. 현재 100개 이상 국가에서 300만명 넘는 아티스트가 활용 중인 가상 캔버스 플랫폼 ‘마그마(Magma)’, 기존 IP를 활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스핀오프 스토리를 만드는 AI 스토리텔링 플랫폼 ‘세카이(Sekai)’ 등이 대표적이다.
아직은 초기 단계…참여자 늘려야
디즈니, 오픈AI가 스토리 사용할까
생성형 AI 시대 속 불거진 콘텐츠 IP 저작권 문제를 해결할 기대주로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사실 이 대표와 스토리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가 훨씬 더 많다.
먼저 스토리 생태계 안에서 거래할 수 있는 콘텐츠 IP를 대거 늘려야 한다. 스토리에선 이를 ‘IP 레고블록’이라고 부른다. 갖고 놀 수 있는 매력적인 블록이 늘어나야 창작자 유입도 많아진다.
레고블록이 늘어나면 앞으로 이런 일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백설공주 오두막’에 살고 있는 ‘해리포터’가 ‘오징어 게임 유니폼’을 입고 ‘귀멸의 칼날 검술’을 쓰는 창작물이다. 현실에선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스토리 생태계에선 실현될 수 있다. 단 선제 조건이 있다. 초거대 IP를 보유한 이들이 일단 레고블록을 등록해야 한다는 점이다.
챗GPT나 미드저니 같은 ‘생성형 AI 플랫폼’을 생태계에 끌여들여야 하는 과제도 있다. 창작자가 AI 학습에 대한 대가를 받기 위해선 AI 플랫폼도 스토리 기반 앱을 써야 한다. AI 플랫폼 입장에선 스토리 앱을 쓰기보단 지금처럼 ‘공짜’로 데이터를 학습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앞으로 어떻게 이용하게 만들지가 관건이다.
상황은 긍정적이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AI 저작권 문제 제기가 커지고 있는 데다 거대 AI 플랫폼도 이 같은 의견에 공감하고 있다.
핍랩스 관계자는 “AI 플랫폼 입장에선 수익을 배분하고 싶어도 방법이 여의치 않다는 의견이 많다. IP 소유권이 불명확하고 그 범위도 추상적이기 때문”이라며 “스토리 생태계가 향후 대세 플랫폼으로 자리 잡으면 이 같은 문제가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다”고 말했다.
[나건웅 기자 na.kunwoong@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7호 (2024.09.25~2024.10.0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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