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27 (금)

[유석재의 돌발史전] 표준국어대사전, 미로인가 개미지옥인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194

조선일보

1999년 발행된 표준국어대사전의 초판. 이후 실물 책으로 발행된 적은 없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신문 맞춤법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 종종 이걸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답은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입니다. 1999년 초판이 발행됐는데, 7년 동안 예산 112억원을 들이고 국어학자 500여 명을 참여시켰습니다. 초판에 수록된 어휘는 48만 개였습니다.

2008년 51만 개 어휘가 수록된 개정판을 냈지만, 실물 책으로는 발행하지 못하고 전자사전으로만 내놓았습니다. 지금은 웹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니(https://stdict.korean.go.kr) 즐겨찾기에 등록해 놓고 수시로 사용할 만합니다.

물론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비판도 끊이지 않습니다. 갱신 속도가 느리고 신어(新語)를 제대로 담지 못하는 반면 사어(死語)가 된 지 오래된 단어나 뜻풀이도 그대로 놔두고 있다는 겁니다. 제대로 뜻풀이를 해주기보다는 비슷한 의미의 다른 단어로 ‘돌려막는’ 경우도 많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지막’이란 단어의 뜻풀이는 이렇습니다.

「명사」 시간상이나 순서상의 맨 끝.

자, 그럼 ‘끝’은 어떻게 풀이하고 있을까요.

「명사」

「1」 시간, 공간, 사물 따위에서 마지막 한계가 되는 곳.

「2」 긴 물건에서 가느다란 쪽의 맨 마지막 부분.

「3」 순서의 마지막

그야말로 무한반복의 지옥 속에 갇힌 느낌도 듭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비판은, 이제 책으로 발행하지 않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다 보니, 갱신을 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바뀐 것인지 잘 모르게 슬그머니 의미를 추가하거나 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최근에 저는 뉴스에 잘 나오는 ‘독대(獨對)’라는 표제어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봤습니다. 권력을 가진 어떤 사람이 더 큰 권력을 가진 어떤 사람에게 이걸 하자고 조르고, 더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은 ‘만나기 싫다는데 왜 자꾸 그래’라며 아이들처럼 싸우는 듯한 모습이 자꾸 뉴스에 나와서입니다. 사전은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1」 『역사』 벼슬아치가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임금을 대하여 정치에 관한 의견을 아뢰던 일.

「2」 어떤 일을 의논하려고 단둘이 만나는 일. 주로 윗사람과의 만남을 이른다.

· 사장님과의 독대.

· 내일로 예정된 큰스님과의 독대는 가슴을 설레게 했다.

· 외국 기자와의 독대는 처음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1999년 초판을 찾아보니 1번의 뜻풀이만 나올 뿐, 2번은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임금’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이미 1926년에 별세(또는 승하·붕어)했으니 과거의 상황이 아니라면 이 말을 쓸 일이 없을텐데, 자꾸만 잘못된 용례로 쓰이다 보니 사전에서도 인정을 해 준 것으로 보이지만, 1999년부터 2024년 사이 과연 어느 시점에 2번의 풀이가 들어갔는지는 잘 알 수 없다는 게 함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은 찾으면 찾을수록 기묘한 면이 더 많이 드러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얼마 전 ‘국어사전 독립선언’(섬앤섬)을 쓴 전직 국어교사이자 시인인 박일환(63)씨가 그런 ‘미궁’을 탐사했던 인물입니다. 사전을 분석해 ‘기이한’ 낱말 400여 개를 찾아낸 것입니다. 과연 어떤 단어들이었을까요.

‘온도차시계’

‘육체문학’

‘기회시’

‘몽롱체’

‘소절수’

‘흡반투쟁’

‘온습회’

‘난탑장’

‘급산’….

웬만한 한국인이라면 살면서 좀처럼 들어보지 못했을 이 기묘한 어휘들이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지금도 버젓이 실려 있다는 겁니다. 뜻풀이는 표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중 소절수는 ‘수표’, 난탑장은 ‘묘지’와 같은 말이라는 데 이르면 더욱 어리둥절해질 지경입니다.

조선일보

저자 박일환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볼 때마다 어휘가 이상하거나 뜻풀이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걸 깨닫고 사전 연구를 시작했죠. 이런 단어들은 대체로 20세기 초 일본어사전이나 일본 백과사전에 있는 것을 가져다 실은 것이었습니다.”

어휘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낱말 풀이를 그대로 갖다 쓴 경우도 있었습니다. ‘표준검사’의 표준국어대사전 풀이는 ‘1.일정한 표준을 정하여 거기에 맞는지의 여부를 측정하는 검사. 2.통계학적 방법을 사용하여…’로 돼 있는데, 이것은 ‘일본국어대사전’의 풀이를 똑같이 번역한 문장이라는 것입니다.

박씨는 “과거 기본을 지키지 않은 편찬 태도에서 비롯된 참사”라고 했습니다. 실소가 나오는 낱말도 적지 않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승기악탕(勝妓樂湯)’이란 음식이 표제어로 올라 있는데, 알고 보니 일본 음식 ‘스키야키(すきやき)’를 한자를 빌려 우리 발음에 가깝게 적고 ‘기생이나 음악보다 나은 탕’이라는 의미를 붙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전에 올라 있어 엉뚱하게 ‘사실 스키야키는 우리 전통 음식이었다’는 오해도 생겨났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어휘를 가져올 당시의 뜻과 달라졌는데도 여전히 사전에 옛 뜻풀이가 올라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간담회(懇談會)’를 ‘정답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라고 풀이했는데 과연 그럴까요? ‘친밀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모임’이라는 ‘고려대 한국어사전’의 풀이가 현재 ‘간담회’의 의미에 더 가깝다는 것입니다.

박씨는 “일본에서 유래한 모든 한자어를 몰아낼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근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지만 이미 우리말로 굳어진 ‘경제’ ‘철학’ ‘예술’ 같은 말을 쓰지 말자는 것은 무리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최소한 오류를 충분히 검토하고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지금은 쓰지 않는 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려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역사와 문화·법률 등에서 유래된 말이 설명 없이 국어사전에 실려 있다면 마치 우리 것인 양 오해할 수 있게 됩니다. 국어사전은 국민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낱말 중심으로 등재하고 그 뜻을 제대로 설명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분기별로 열리는 국립국어원 국어사전 정보보완심의위원회에서 일부 수정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고, 전면 개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발을 새로 살 때까지는 신고 있는 신발을 고쳐 신어야 한다.”

어쨌든 지금 여전히 한국어 문장과 표기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것입니다. 난관을 헤쳐가면서라도 말이죠.

조선일보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194

[유석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