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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간은 유독 역대 대통령을 중심 소재로 한 영화·드라마가 많았습니다. 여름에 출시돼 큰 인기를 끌었던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은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 뒤를 잇는 정쟁·암투를 담은 드라마였는데요.
작품의 중심 줄거리는 가상이지만 작품 곳곳에 현실 정치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심어져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장면이나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의 죽음이 정치 구도를 일순간에 뒤집는 장면 등이 대표적입니다. 임기 말 대통령이 자녀 문제로 곤욕을 겪는 것도 역대 정권에서 수차례 반복된 모습이죠. 법무연수원으로 좌천됐다 화려하게 복귀하는 검사도 등장하는데, 이 역시 독자 여러분께 익숙한 전개입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올해 초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소재로 한 '건국전쟁'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다룬 '길위에 김대중' 등 다큐멘터리 영화가 출시됐으며, 12·12 군사반란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그려낸 '서울의 봄'도 개봉 1년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22대 국회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총선이 있는 시점이다 보니 선거를 전후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뜨거워지고 이를 겨냥한 정치 콘텐츠들이 다수 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건국전쟁' '길위에 김대중' '서울의 봄'은 실제 역사적 사건을 중심 소재로 삼았는데요. 개봉 시점도 총선이 치러지기 전이었던 탓에 정치적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많았습니다.
총선 과정에서 이 영화들이 얼마나 영향을 끼쳤고, 선거 결과가 어땠는지는 독자 여러분께서 충분히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선거의 열기는 어느 정도 잦아든 시점이니 이번 기사에서는 정치적 해석 대신 3개 작품이 그려낸 사건들의 실제는 어땠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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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
12·12 사태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장군은 군사반란에 맞서 싸운 대표적 인물입니다. 영화 서울의 봄도 전두환 전 대통령(당시 보안사령관)과 장 전 사령관의 대결 구도를 중심으로 삼고 있죠.
장 전 사령관은 당시 약 10시간에 걸친 군사반란 전개 과정을 적어 비밀리에 보관하고 있다가 2006년 언론을 통해 공개했습니다. 아마도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자료 가운데 12·12 사태의 전개 과정을 가장 상세히 서술한 기록이 아닐까 싶은데요.
기록 말미에 사건을 총평하는 부분에서는 반란군의 치밀한 계획 앞에 진압군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잘 나타내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패배를 직감하고 반란 진압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러 장 전 사령관이 "전투사단급 전투력이 넘는 내 휘하의 수도경비사령부에서 나의 부하가 반란군에게 사격을 가한 것은 오직 국방부 옥상에 있었던 이것(방공포 사격) 한 건뿐일 정도였으니, 이 부대의 장교 보직자 450명을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4년여간 수도경비사령관을 하던 차규헌 장군이 '하나회' 사조직 멤버로 구성한 결과임이 분명하게 입증되었다"고 한탄하는 부분입니다.
장 전 사령관이 약 10시간 동안 대항한 기록도 전화로 병력 지원을 요청하다 무산되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장 전 사령관 휘하의 정예부대인 제30경비단·제33경비단·헌병단 등은 반란군의 주축이었고, 수도권 인근에 위치한 1·3·5공수여단까지 모두 반란군으로 넘어간 상태였죠. 반란군은 여기에 노태우 당시 사단장이 이끌던 전방부대인 9사단마저 동원했는데, 진압군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9공수여단은 반란군의 신사협정 제안을 믿고 회군해버렸죠. 휘하의 비전투병 약 100명, 전차 1개 소대(4대)만으로 저항하려던 장 전 사령관도 결국 부대를 해산시키며 12·12 군사반란은 성공하게 됩니다.
남산의 부장들 : 육사 11기들 불만이 쿠데타 시작점
1992년 출간된 책 '남산의 부장들'은 중앙정보부 시야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되짚어보는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원작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동명의 영화까지 크게 흥행했는데요.
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기를 다루지만 책 분량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말미에 12·12 군사반란에 관한 내용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을 포함한 12·12의 주역들이 왜 반란을 일으켰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도 다수 등장하는데요. 이를 이해하려면 사건이 벌어지기 한참 전인 196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2·12 군사반란이 벌어지기 무려 16년 전의 일이죠.
육사 11기인 이들은 당시 소령~대위 계급을 달고 재직 중이었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 주역들(육사 5기·8기)에 비해 계급은 한참 낮지만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며 나름의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당시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임하다 공금 유용·주가 조작 의혹 등으로 물러나 있던 상태)의 측근 40여 명을 잡아 가두는 '친위 쿠데타' 계획까지 세우게 되죠. 김 전 총리를 포함해 당시 요직을 꿰차고 있던 육사 8기 세력들을 제거하겠다는 구상입니다.
그런데 육사 11기 동기들끼리 술자리에서 푸념을 하다 시작된 이 계획은 꽤 허술하게 진행됐다고 합니다. 결국 중앙정보부에 소식이 전해지며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 위기에까지 몰렸다가 김재춘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변호로 겨우 문책을 면하게 됩니다.
16년 후 육사 11기들이 12·12 군사반란을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했는지를 떠올리면 이 당시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책에는 육사 11기들이 김종필 전 총리와 측근들을 왜 급히 제거하려 했는지에 대한 서술도 등장하는데요.
김용태 전 의원(5·16 참여자)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육사 11기)은 혁명 주체 8기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며 "그런데 몇 살 차이 안 나는 혁명 주체들은 최고위원도 나오고 벼락출세도 하는데 정규 육사 출신(11기)은 상대적으로 혜택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최고의 실세 장관인 중앙정보부장을 1926년생(김종필·육사 8기)·1927년생(김재춘·육사 5기)들이 권력 다툼을 하며 나눠 갖는데, 1930년대 초반 출생인 육사 11기들은 소령도 몇 없고 대부분 직급이 대위에 그친 상태였죠. 노태우 전 대통령마저도 대위 직급이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1963년 당시 육사 5기·8기 선배들도 30대 청년인 것을 감안하면 육사 11기 입장에서는 눈앞이 깜깜해질 만한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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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 김대중
'길위에 김대중'에는 1964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하던 한일협정과 이에 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응이 그려집니다.
영화에서는 "야당의 강경파는 한일협정을 매국이라 주장하며 격렬한 반대시위를 벌였다. 분노한 국민들은 거리로 뛰어들었다"면서 "김대중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의 국익을 보장하는 내용으로 협상한다면 야당도 이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고 소개했습니다. 이어서 "김대중이 한일협정 원천봉쇄 투쟁에 앞장설 것으로 기대했던 야당 의원들은 일제히 그에게 등을 돌렸다"고 설명했죠. 이는 김 전 대통령의 육성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김 전 대통령은 훗날 인터뷰에서 "반대를 주도한 사람들은 한일회담을 내용도 잘 모르면서 매국이라고 그냥 떠들기만 하고 그렇게 한 일이 많았어요. 결국 목적은 한일회담을 거부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을 타도하려는 정권 타도에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근데 내가 볼 때 그런 건 전혀 아니거든요"라고 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평생에 걸쳐 군사정권과 싸워온 인물인데도 박 전 대통령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이런 통합 정신을 대표하는 사건이 박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사업입니다. 그는 대통령선거에서부터 이를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취임 후인 1999년에 이와 관련한 자신의 생각을 확고히 밝힌 일화가 있습니다.
업무보고를 받고자 대구를 방문해 박 전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던 이들과 만난 자리였는데요.
조선일보에 따르면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박 대통령은 6·25 이후 실의(失意)에 빠진 국민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 서구 국가처럼 된다. 큰 공장을 짓고 우리 물건을 만들어 세계에 팔 수 있다. 고속도로도 놓을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국민을 그렇게 만든 공로는 참으로 지대하다. 근대화를 이룬 것도 부인할 수 없다"며 "그동안 대한민국 대통령에겐 하나같이 가슴 아픈 일만 있었는데 그런 가운데 박 대통령은 국민 마음속에서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근대화를 이룬 것도 있지만 국민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하고 확신감을 갖도록 해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한 공이 크다. 역사에서 재평가받아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미국 국민은 마음속에 대들보 같은 지도자로 워싱턴·제퍼슨·링컨·케네디 같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미국보다 훨씬 긴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런 지도자는 세종대왕·이순신 정도만 말하고 있다. 이제 박 대통령은 역사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라고 국민에게 알려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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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전쟁
이승만 전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근래 들어 보수진영에서 집중 조명하고 있는 그의 업적 중 하나입니다. 광복 직후 한국의 지주계급을 자본가 계급으로 전환시켜 훗날 한강의 기적을 일궈낼 토대를 만들었다는 내용인데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도 22대 총선이 한창이던 때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한미 상호조약으로 우리나라 안보 기틀(을 마련하고) 농지개혁으로 만석꾼의 나라를 기업 나라로 바꾼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대한민국을 이 자리에 오게 한 결정적 장면"이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대통령기록관의 연설 기록 중 농지개혁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949년 5월 초 '국회 제1회 정기회의 폐회식 치사(致辭)' 때입니다. 이 전 대통령은 이 연설을 통해 "금반 회기 중에 여러분이 제시한 농지개혁법은 특히 민중의 대환영을 받을 것이다. 본 농지개혁법에 대해서는 지주들에게 과히 억울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인데, 내가 본 바로는 그리 치우침이 없이 잘되었다고 생각되는 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의 발언처럼 국회는 그해 4월 농지개혁법을 통과시켰는데요. 정부가 농지개혁법안을 의회에 제출한 것이 전년도 8월 15일인 것을 감안하면 세간의 인식보다는 많은 논의를 거쳐 법안이 의결된 모습입니다.
당시 공산진영과 대결하던 미국이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미 군정 시절부터 농지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인 덕에 큰 어려움 없이 개혁이 추진됐다는 인식이 존재하는데요. 국회에는 지주계층 이익을 대변하는 의원 비중이 높아 국회 통과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듯 농지개혁 법안이 어렵게 의결됐지만 한 달여 만에 정부가 이를 국회로 환송하는 일이 발생했는데요.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지주에 대한 보상이 확대되는 문제 등으로 인해 정부 재정이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탓이었죠. 최종적으로 시행되는 형태의 법률은 이듬해인 1950년에 이르러서야 완성이 됩니다.
연설 기록을 살펴보면 이 전 대통령은 '토지개혁'이란 표현을 병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49년 7월 '만민공락(萬民共樂)의 국초(國礎)를 전정(奠定), 이 대통령년의 시월정방침 연시(演示)'에서 이 전 대통령은 "헌법의 조항에 의하여 앞으로 토지개혁법이 제정 시행될 것이니 토지개혁의 기본 목표는 전제적, 자본제적 토지제도의 모순을 제거하여 농가경제의 자주성을 부여함으로써 토지 생산력의 증강과 농촌문화의 발전 기여에 지향될 것인 고로 먼저 소작제도를 철폐하여 경자유기전의 원칙을 확립할 것이나, 농민 대중의 원하는 바에 의하여 정부는 균등한 농지를 적당한 가격 또는 현물 보상의 방식으로 농민에게 분배할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의 연설'은 연설문과 각종 기록, 문화 콘텐츠를 통해 대통령의 생각과 정치 역정을 재조명하는 연재물입니다. 구독하시면 매주 역대 대통령들을 소재로 한 흥미 있는 기사를 접하실 수 있습니다.
[문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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