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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이스라엘, 아예 공장 세워 폭탄 삐삐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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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보도로 본 삐삐 테러 전말

조선일보

18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군 관계작 소지했던 휴대용 무전기가 폭발한 모습. 전날에 이은 폭발 사건으로 최소 20명이 사망하고, 450명 이상이 다쳤다./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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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反)이스라엘 이슬람 무장 단체 헤즈볼라의 근거지 레바논에서 17~18일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무선호출기(삐삐)·무전기의 동시다발적 원격 폭발이 발생한 후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이스라엘의 치밀한 준비 과정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헤즈볼라가 사용해온 호출기 수천개가 거의 같은 시간에 폭발하자 이스라엘이 유통 과정에 호출기를 낚아채 조작했다는 추측이 나왔는데, 이 수준을 넘어 아예 해외에 위장 공장을 세우고 레바논에 수출할 호출기를 직접 생산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여러 해에 걸쳐 정체를 숨긴 ‘유령 회사’를 해외에 세우고 사업을 확장하면서 ‘때[時]’를 노렸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NYT)는 18일 익명의 전현직 국방·정보 당국자들을 인용해 “레바논 전역에서 폭발한 대만 브랜드(골드 아폴로)의 호출기를 위탁 생산한 헝가리의 ‘BAC 컨설팅’은 실제로 사업 활동을 하면서 평범한 고객사를 위한 호출기도 만들어 팔았다. 하지만 이 회사는 이스라엘의 최전선(最前線) 격이었고 이들에게 진짜 의미 있는 ‘고객’은 헤즈볼라뿐이었다”고 전했다.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BAC 컨설팅’은 2022년 설립됐다. 현재는 사무실이 비고 홈페이지도 폐쇄된 상태다. 인맥 사이트 ‘링크트인’에 따르면 CEO(최고경영자)로 알려진 여성 ‘바르소니-아르시디아코노 크리스티아나’는 입자물리학 박사로 유럽위원회·유네스코 등과 협력하는 등 국제기구 및 글로벌 회사와 다양한 활동을 해왔지만, 지금은 연락이 끊긴 상태다. ‘BAC’는 그의 이름 앞 글자를 딴 명칭으로 추정된다.

조선일보

그래픽=양인성


NYT는 “사실은 이스라엘 정보 요원인 위장 노동자들의 신분을 가리기 위해 BAC 외에도 ‘껍데기 회사(shell company)’ 최소 두 곳이 설립됐다”고 전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이스라엘 정보 조직 ‘모사드’ 요원들이 위탁 생산 기업 직원으로 변신해 만들어 판 호출기는 2022년 여름 즈음부터 레바논에 수출됐다. 지난 2월 헤즈볼라 지도부가 위치 추적 우려를 이유로 휴대전화를 전면 금지하고 나서 레바논 수출량이 급증했다고 한다.

이틀에 걸친 연쇄 폭발로 레바논에선 최소 32명이 숨지고 4000여 명이 다쳤다고 레바논 보건 당국은 밝혔다. 이 중엔 헤즈볼라나 반(反)이스라엘 활동과 무관한 어린이도 다수 포함됐다고 알려졌다. 현지 주요 매체 등은 다수의 당국자를 인용해 연쇄 폭발 테러를 이스라엘이 일으켰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이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하나둘 드러나는 이스라엘의 광범위한 해외 공작(工作)의 실체를 드러냈다는 평가다.

사건 직후 호출기엔 대만 기업 ‘골드 아폴로’ 상표가 부착됐다고 알려졌고, 이후 이 회사는 “문제의 호출기가 제조된 업체는 브랜드 사용료를 내고 위탁 생산을 하는 부다페스트 소재 ‘BAC 컨설팅’”이라고 밝혔다. NYT에 따르면 동유럽의 평범한 중소기업으로 추정됐던 이 기업은 사실상 이스라엘 정보 당국의 ‘공작 공장’과 다름없었다. BAC는 평상시엔 일반 업체처럼 주문을 받고 정상적인 제품을 제조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 업체인 척 위장해오며 기회를 엿봤고, 실제로 헤즈볼라가 주문을 넣자 탄약 등을 넣은 무선호출기를 제조했다.

이스라엘 측은 헤즈볼라가 주문한 무선호출기의 배터리 표면에 강력한 폭발 물질인 펜타에리트리톨 테트라니트레이트(PETN)를 넣었다고 알려졌다. 알자지라는 “레바논 정부는 불발한 호출기를 분해해 PETN 1~3g가량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호출기의 배터리 주변에선 공 형태의 금속이 발견됐는데, 이는 폭발 시 총알처럼 튀어나가 폭발의 치사율을 높였다. 사전에 정해진 메시지를 보내면 폭발하도록 설계된 이 호출기들을 이스라엘 요원들은 (누르면 터지는) ‘버튼’이라고 불렀다고 NYT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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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양인성


일각에선 무선호출기가 완제품 상태로 레바논에 수입되는 과정에 폭발 물질을 넣었을 가능성도 여전히 제기된다. 미국 등 서방의 광범위한 제재를 받는 레바논은 수출입 통관 절차에만 약 3개월이 걸린다. 이에 호출기가 항구 등에 수개월 묶인 틈을 타 모사드가 접근해 호출기에 폭발 장치를 심는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한편 호출기 폭발 다음 날인 18일 폭발한 무전기 일본 브랜드인 ‘아이콤’ 제품인 ‘IC-V82′라고 적혀 있었는데, 아이콤 측은 “약 10년 전 생산이 중단된 제품으로 복제품이거나 과거 판매된 제품이 (폭발용으로) 개조됐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일본 언론에 밝혔다.

헤즈볼라는 휴대전화 위치 추적 우려 탓에 호출기로 주력 통신수단을 바꿨다. 이스라엘이 휴대전화를 해킹해 원격으로 마이크·카메라 등을 작동시켜 사용자를 감시하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이야기는 몇 년 전부터 아랍권에 퍼졌는데 이 ‘소문’의 출처와 진위는 여전히 불명확하다. 이에 이런 소문 확산의 배경에 이스라엘의 여론전이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흔한 통신기기가 ‘죽음의 도구’로 돌변한 테러를 이틀 연속 당한 레바논과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에 대한 보복을 천명하고 나섰다. 헤즈볼라는 18일 이스라엘 포병 진지를 로켓으로 공격했다고 밝혔다. 아직 피해나 사상자는 없다고 알려졌다. 이스라엘은 한편 이날 하마스(팔레스타인의 이슬람 무장 단체)와 전쟁 중인 가자지구에 주둔하던 정예 ‘98사단’을 북부 레바논 접경지대로 이동시켜 헤즈볼라와의 전면전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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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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