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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0 (금)

의병장 이인영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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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나는 역사다] 이인영 (1867~1909)



’1909년 9월20일, 경성 감옥에서 처형당하던 날, 이인영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때의 선택을 후회했을까, 아니면 원칙을 지켰다며 뿌듯해했을까?



이인영은 경기도 여주 사람. 옛날 학문을 배우며 충과 효를 익혔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1895년 일본 사람이 궁궐에 침입해 왕비를 암살하자 이인영은 한동안 의병 활동을 했다(을미의병). 춘천과 양구 사이에서 일본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1896년에 은퇴해 문경에서 농사를 지었다. 1905년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뒤 다시 의병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을사의병), 병든 아버지를 돌보겠다며 집에 남았다.



1907년 일본이 군대를 해산하자 대한제국 군대에 있던 병사들이 의병 운동에 참여했다(정미의병). 의병장들이 이인영을 찾아와 함께하자고 부탁했다. 이때도 처음에는 병든 아버지 때문에 거절하였으나, 끝내는 ‘13도 창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병의 전국 연합 조직이 창설되고 그 사령관을 이인영이 맡은 것.



의병 전국 연합의 병력은 수천명, 한때 정규군이던 사람도 상당수. 보급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토론이 있었다. 일반인의 재산을 거두어 군수 물자로 쓰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이인영은 반대했다. ‘차마 우리가 할 바가 아니오, 또 의병이 할 행위가 아니’라며, 일본에 부역하는 사람의 재산을 탈취해 군자금으로 쓰자고 했다.



1907년 말과 1908년 초에 13도 창의군은 서울 근교로 진군했다. 병력이 집결하는 대로 서울을 공격한다는 작전. 그런데 1908년 1월, 이인영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버지의 3년 상을 치러야 한다며 문경으로 돌아간다. 다른 의병 지도자가 “국가가 가족보다 중요하다”며 말렸으나, “나라에 불충하면 어버이께 불효이며, 어버이에 불효하면 나라에 불충이라”며 사령관 이인영은 떠났다. 지식인 이인영의 선택.



의병 부대의 ‘서울 진공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인영은 이듬해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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