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3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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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홍종인씨를 단장으로 한 한국산악회 산하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이 울릉도에 도착한 게 9월18일이었다. 부산항에서 출발한 교통부 소속 선박 진남호에 몸을 싣고 하루 꼬박 출렁이는 파도를 견디며 울릉도에 도착한 조사 단은 사흘 전 미군 비행기가 독도에 폭탄 여러 발을 투하하고 돌아갔다는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당시 동아일보는 사건을 이렇게 보도했다.
“미군 비행기가 틀림없으리라고 추정되는 비행기 1대가 폭탄을 던져서 출어 중의 어민이 화급히 퇴피치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본 조사단(한국산악회 조사단)에서 곧 해군본부 총참모장에게 이 사실을 통지하는 동시에 본 조사단은 안전한 항해를 보장하기 위하여 공군 관계 당국에 연락기를 청탁하고 19일에 행동(조사)을 유예하고 있음.”
미군이 독도에 폭탄을 투하한 9월15일 오전 11시께, 울릉통조림공장 소속선 광영호는 독도 주변에서 소라, 전복 등을 따기 위해 조업에 나선 상황이었다. 해녀 14명과 선원 등 23명이 작업에 한창 열을 올리던 때, 미군 비행기 한대가 독도 주변을 돌더니 폭탄 4개를 투하한 뒤 일본 쪽으로 돌아갔다. 어민들은 독도 인근 해역에 군사 훈련에 따른 출어 금지나, 미 공군의 연습 폭격 목표로 지정된 일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조업에 나섰는데도 이런 일이 벌어지자 극도의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어민들에게 미군의 독도 폭격 훈련이 더 큰 공포로 다가온 건, 4년 전 큰 참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실제 1948년 6월8일, 독도를 표적으로 미군의 대규모 폭격 훈련 과정에 우리 어민 여럿이 희생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비(B)-29 폭격기 20여대가 2만3천피트 상공에서 1000파운드(453㎏) 규모 연습탄 76개를 독도를 향해 투하했고, 아무것도 모른 채 조업 중이던 어민 14명이 숨졌다. 당시 상황을 추적 기록한 동북아역사재단의 광복 후 독도와 언론보도: 1948년 독도폭격사건’(홍성근·2020) 을 보면, 현장에서 살아남은 한 어민은 “미역 채취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정체 모를 비행기 다수가 내습하여 거기있는 선박을 목표로 수차에 걸쳐 폭탄을 투하하고 또 기관총을 소사하였다”며 “약 23척 선박이 있었는데 그중 발동선 2척과 ‘뎀마’ 2척이 겨우 사격을 면하여 귀환하였을 뿐이고, 내가 탔던 해양환에서도 김동술 군이 많은 기총 탄환에 맞아 사망하였는데 아직 시체도 찾지 못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당시 미 군정사령관 존 하지 중장은 “현장 촬영 사진을 심사한 결과 독도 근해에 있는 조그마한 어선들은 B29폭격기의 고도 폭격 연습 시에 바위로 간취되었던 것이 판명되었다”며 “폭격 30분 후에 정찰기가 촬영한 사진에 의하여 이 위험지구 내에 다수의 소선박이 있음을 발견하였고, 정식 조사가 끝나는 대로 완전한 보고를 상급 사령부에 절충할 터”라고 사실을 인정했다.
이와 관련해 지금도 해마다 독도 현지에서는 독도 폭격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희생자 위령 행사가 열리고 있다. 앞서 1947년 4월에도 독도에서 폭격 훈련이 있었다는 증언과 언론 보도가 남아 있다.
이 가운데서도 1952년 9월 독도 폭격이 특히 주목받는 것은 일본 정부가 지금도 이 사건을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18일 일본 외무성 누리집 ‘일본 영토를 둘러싼 정세’ 항목을 보면 “(일본이 독도를) 아직 점령 중이던 1951년 7월, 연합국 총사령부는 지령(SCAPIN) 제2160호를 통해 독도를 미군 폭격훈련 지역으로 지정했다”며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발효 직후인 1952년 7월, 미군이 독도를 계속 훈련구역으로 사용하기를 희망함에 따라 미·일 행정협정(현재 ‘미·일 지위협정’)에 근거해 협정의 이행에 관한 미·일 협의기관으로 설립된 합동위원회는 재일미군이 사용하는 폭격훈련구역의 하나로 독도를 지정하고 외무성은 이를 고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외무성은 1953년에는 미군이 독도를 더는 폭격 훈련 지역으로 쓰지 않고, 독도 주변 해역 어민들의 전복·미역 채취 허용 요청 등을 받아들여 (미·일) 합동위원회가 독도를 폭격 훈련지역에서 제외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적었다.
당시 미·일 합동위원회가 독도를 폭격연습지로 지정·해제하는 과정에 미국이 일본과 이 문제를 협의한 게 독도의 일본 영유권을 인정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실제 일본 외무성은 “미·일 행정협정에 따르면, 합동위원회는 ‘일본 국내의 시설 또는 구역을 결정하는 협의기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며 “독도가 합동위원회에서 협의돼 미군의 (군사 훈련) 구역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독도가 일본 영토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관방장관 산하 영토·주권 대책기획조정실 누리집에도 “독도가 합동위원회에서 협의되고 주일미군이 사용하는 지역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을 점령·통치했던 연합국 최고사령부(GHQ)는 1946년 1월 29일 지령(SCAPIN) 제677호에서 울릉도와 ‘리앙쿠르암’(독도), 제주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다고 명시(제3조)했다. 일본이 패전 뒤 전후 처리를 하던 1951년 대장성령 4호(2월13일)와 총리부령 24호(6월6일)에서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를 일본 부속도서에서 뺀 것도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일본 정부가 패전 직후였던 1950년대 초 사건을 놓고 지금까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사학과)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1952년 독도 폭격 사건은 일본 정부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 등에서 독도에 관한 영유권을 확인받을 수 없자 그 증거를 스스로 만든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며 “주일미군을 개입시켜 독도를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하고 해제하는 과정을 거쳐 미국이 독도를 일본령으로 인정했다는 주장을 삼은 것인데, 그런 논리라면 이미 한국전쟁기 미국 공군은 한국 국방부와 협의를 거쳐 독도를 폭격 연습장으로 지정한 바 있다”고 꼬집었다.
도쿄/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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