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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9 (목)

의료개혁 논의, '그들'에게만 맡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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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건강연구소 ]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불과 몇 개월 만에 의료를 '개혁'하자는 주장이 대세가 되었다. 일단, 혼란스럽다. 개혁의 뜻은 불분명하고 지향과 방법도 제각각이다, 왜 개혁이 필요한지도 그렇지만,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으니 더욱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나온 '개혁론' 대부분은 정책에 관한 것이다. 그냥 구호이든, 새로운 정책이든, 정책 수정이든, 약간의 보완이든 마찬가지다. 정부, 학자, 전문가, 의료 전문직, 환자 모두 '정책 바꾸기'를 개혁의 전부로 이해하는 듯하다. 문제는 같은 말을 써도 다르고 다른 말로 해도 어떤 때는 비슷한, 기어코 흩어지는 공허하고 무력한 말이 많다는 점이다.

개혁의 목록도 종잡을 수 없게 다양하니 가히 백화점식 또는 투망식이라 할만하다. 이제는 목적도 모호해진 의대 입학정원부터, 전공의 수련 제도, 의료 수가, 실손 보험, 일부 부문에 대한 재정 지원, 심지어 환자의 의료 이용 규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정책이 이른바 개혁 대상이 되어 있다. 내용은커녕 말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누군가에는 어쩌면 '그들만의' 개혁 논의라 할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한 번도 제대로 개혁을 논의해 본 적이 없는 탓이 크다. 그만큼 내용도 방법도 미숙하고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도 크지 않다. '쇼윈도우형' 개혁이 되기 십상, 아무리 해도 논의 결과가 생산적이기는 쉽지 않다. 지금의 잣대로는 비관적이다.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유난히 두드러지는 의료 개혁론의 특징 한 가지, 그것은 모두가 이상형, 바람직한 미래, 규범만 말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OO이 충족되어야 하고, OO는 효과적이어야 하며, 충분한 투자가 필요하다는 식이 대부분이다. 주체는 모호하고 책임질 사람은 따로 없는 수동태가 태반이다. 그 규범이 잘못되었다고, 또는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계속 좀 더 나은 상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실천 없는 지향만으로는 발걸음을 뗄 수 없다.

핵심 문제는,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 그런 개혁은 늘 불가능하다는 것, 모든 주체의 생존과 존립의 토대인 경제와 모순관계라는 데에 있다. 한국 의료는 최근 한 세대 동안 거의 완전히 상품이 되었고 시장 원리로 움직이게 되었다. 칼 폴라니 식으로 말하면, 의료라는 사회의 보호기능은 뿌리가 뽑혀 완전히 시장으로 포섭된 상태다. 과연 '이중운동'이 가능한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시장화, 영리화, 자본주의화가 일방적이다.

단순한 개별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체제화'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병원은 중증 환자만 보도록 규제하자는 개혁안을 생각해보자. 정책 기술로는, 좀 어렵지만,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막상 문제는 대학병원의 경제체제에 있다. 아마도 전체 대학병원 수를 줄이고, 각 병원의 병상도 줄여야 할 것이다. 기껏 만든 암병원을 없애야 할지도 모른다. 병원의 경제는 축소가 불가피하다.

이번 사태로도 경험했지만, 병원의 경제체제는 그다음부터 진짜다. 병원의 일자리는? 거래하던 제약사와 약품 유통업자는? 의료 장비와 리스와 그 산업은? 그리고, 거래하는 은행은? 이런 것을 다 모은 '의료산업'은?

개혁을 말하는 정부도 이런 일련의 사태, 그 연관 고리를 모르지 않는다. 입 밖에 내지 않더라도 '재정 중립', 즉 단기적으로는 현재의 수입과 지출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목표를 굳이 숨기지 않는 이유다. 재정 중립을 위해 개입하면 그에 따른 연관효과, 시장 효과가 다시 문제다. 당장, 보험료를 크게 올리지 않고도 이 모든 변화가 가능한가? 그리고 그 다음은 보험 가입자가 돈을 더 내야 하고 기업도 추가 부담을 해야 한다.

흔히 잊기 쉬운 것, 잊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다른 대부분의 개혁안도 "문제는 경제"라는 사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더라도, 경제체제로서의 의료를 개혁하기는 정말 어렵다. 모든 이해당사자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유지하는, 즉 '경제적 중립'의 의료 개혁이 아닌 한, 결과는 그만두고라도 생존 투쟁 수준의 저항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수입, 이익, 투자, 부채가 어떤 의미인지, 체제 전체가 얼마나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지, 우리 모두 모르지 않는다.

이제, 크든 작든 한국의 의료개혁은 경제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 '시장적 개혁'과 새로운 사회적 체제를 지향하는 '비시장적 개혁'으로 나눌 수밖에 없다. 사실 '시장적 개혁'은 형용 모순이다. 이미 시장형 체계이고 앞으로 더욱 그럴 것이니, 개혁이고 뭐고 가만히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겉모양과 무관하게, 아무리 급진적인 것처럼 보여도 이런 개혁은 결국 현상 유지, 모순 심화의 길로 가게 마련이다. 물론, 유혈이 낭자하고 (특히 경제적 약자 중에) 피해자가 속출하는 '지옥도'가 펼쳐질 터.

'비시장적 개혁'은 전혀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아마도 그 어떤 상상도 넘어서야 할 것이다. 공공병원이 의료 시장에 속해 있는 한, 공공병원 확대조차 개혁의 가느다란 실마리일 뿐이다. 국민건강보험이 의료시장의 엔진 역할을 하는 한, 보장성 강화조차 좀처럼 시장 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탈시장화, 탈상품화, 탈자본주의화가 유일한 선택지다. 한두 정책이 아니라, 몇 가지 수정이 아니라, 체제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그 누구도 함부로 개혁을 말할 사정이 아니다. 우리는 장기적인 체제 개혁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은 이를 준비할 시기이자 또한 기회임을 믿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한 '철학적 장기주의자'가 아니다(☞관련자료 바로가기). 현실에 가득한 사람들의 고통을 줄이고 해결하려면 단기를 바라보는 정책도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어떤 정책 수정이라도 그것은 비시장적 개혁에 조응하고 정렬되는 것이어야 한다. 한 마디로, 시장적 모순에 개입하되 비시장적 대안(또는 그 실마리와 단초)을 지지한다.

시민건강연구소는 바람직한 의료개혁의 길을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다음주 화요일(9/24)부터 "'의료 개혁'이라는 신화 – 현실, 한계, 전망"이라는 주제로 서리풀학당을 개최한다(☞관련자료 바로가기).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린다.

프레시안

▲15일 충북 충주의료원 응급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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