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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세계 시인' 김혜순 "한국, 억울한 유령의 밀도 높은 나라…빼곡한 죽음 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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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자서전' 독일 출간 앞두고 대담 나서
"모두의 경험인 죽음, 시인만이 말할 수 있어"
한국일보

김혜순 시인이 12일 광주 북구 광주비엔날레 독일관에서 열린 대담에서 자신의 시를 읽고 있다. 광주=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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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아서 유령의 밀도가 엄청 높은 나라예요."

몸으로 '시(詩)하는' 시인 김혜순은 12일 광주 북구에서 열린 대담 '이 입을 통해 말하는 자 누구인가'에서 죽음과 폭력, 고통을 사유하는 그의 시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그 목소리들이 저를 점령해서 그런 사건들 속에 숨은 다양한 존재들의 빼곡한 죽음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 시인의 말이다. 도처에 도사린 고통을 문학으로 선명하게 파헤치는 그의 작업을 동시대의 세계는 단결한 채 주목하고 있다.

이날 대담은 김 시인이 2016년 발표한 시집 '죽음의 자서전'의 독일어 번역본 출간을 앞두고 열렸다. 영미권에서는 올해 전미도서비평가협회(NBCC) 시 부문을 수상하고, 2022년 영국 왕립문학협회(RSL)의 국제작가로 선정되는 등 주목을 받은 김 시인이지만 유럽권에는 아직 그의 시집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 시인의 시를 향한 갈증은 이미 존재한다. 이날 대담자로 나선 번역가 박술은 "지난해 독일 베를린 시 페스티벌에서 진행한 김 시인의 강연 '혀 없는 모국어'가 현지에서 '시인 파울 첼란의 1960년 연설 '자오선'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시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전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죽음의 자서전' 독일 출판사 피셔는 출간 일정을 앞당겨 내년 2월 번역본을 내놓기로 했다.

"죽음 실천이 시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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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오른쪽) 시인과 박술 번역가가 12일 광주 북구에서 진행된 대담에서 발언하고 있다. 광주=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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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시인은 죽음을 "개별적이고 각자적인 경험"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렇기에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직 "수동적 죽음을 반복하면서 죽임에 저항하는 존재"인 시인만이 이를 해낼 수 있다고 그는 여긴다. 자신을 죽여 여럿, 즉 복수가 된 존재의 글쓰기이기에 김 시인의 시는 '나'를 벗어나 타자와 소외된 존재와도 소통한다. 이처럼 "죽음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 시의 정치학"이라는 것이 시인의 말이다. 김 시인은 '죽음의 자서전'으로부터 '날개환상통'(2019)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2022)라는 이른바 죽음 3부작을 펴냈다.

시집 '죽음의 자서전'에는 죽음 못지않게 요리에 관한 시가 많다고 김 시인은 언급하기도 했다. "'요리하다'가 나에게는 '시하다'"라는 것이 그의 말이다. 김 시인은 "잘 때를 빼놓고 제일 많이 머무르는 공간은 책상 아닌 부엌"이라면서 "나와 이전의 여자들은 어느 공간을 점유하다가 세상을 떠났을까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네 엄마의 부엌엔/배고픈 너의 푹 꺼진 배/녹슨 프라이팬처럼/검은 벽에 매달려 있는데"라고 쓴 자신의 시 '저녁 메뉴'를 읽은 그는 "엄마, 여성 스스로 자신을 요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며 "고통, 비명을 이루는 '모음'을 여성의 언어와 관련지어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10년간 해외 주요 문학상을 가장 많이 수상한 한국 작가인 김 시인은 "노벨문학상을 제외하고 모든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런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면서도 올해 NBCC 수상 후 외부 활동이 없었던 그를 만나려 이날 대담장에는 인파가 몰렸다. 김 시인이 지금까지 낸 책을 모두 가져와 사인을 받은 한 남성은 "언제 또 뵐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서울에서 왔다"고 귀띔했다.


광주=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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