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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크게 한탕 하자" 무기고서 카빈 탈취 2인조 대낮 납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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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서 만난 이종대·문도석 월급 찾아오던 직원 살해[뉴스속 오늘]

포위망 좁히자 가족 살해 뒤 '최후'…문, 아내에게 "재혼해 잘살아라"

뉴스1

ⓒ News1 윤주희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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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김학진 기자 = 1972년 9월 12일 '2인조 범죄자' 이종대(38)와 문도석(31)은 M1 소총을 들고 대낮 서울의 한 은행에서 예금한 현금을 찾아 나선 남성 A 씨를 자동차로 납치했다. 이들은 A 씨가 격렬하게 저항하자 그를 차에서 총기로 살해한 뒤 인근의 야산에 암매장했다.

대낮에 대범하게 벌어진 범행이었지만 당시 시민들은 이종대와 문도석이 전투복을 입고 있었고, 가짜 관용차 번호판을 단 차로 범행을 저질러 범죄 행위가 아닌 범죄자 연행에 일어난 과정이라고 오해하며 아무도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범행에 이용된 차가 공덕동 부근을 지나며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고, 이중 한발이 지나가던 행인의 팔을 맞히며 사건이 접수돼, 경찰의 수사가 시작됐다.

당시 30대 괴한 두 명에게 납치된 뒤 실종된 A 씨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추후 경찰 수사에서 용인시 기흥단지의 한 골프장에 매장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당시 경찰은 장비와 인력 부족 등의 한계만 탓하며 탐문수사와 시민 제보에 의존했고, 사건은 점차 미궁 속에 빠져들며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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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용된 실제 총기. sbs '꼬꼬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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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만남의 시작은 어떻게?…총기 절취해 '한탕' 꿈꿔

총기 범죄에 앞서 교도소 동기였던 그들은 전과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생활고가 지속되자 출소 수개월 뒤 첫 범행을 모의했다.

주범 격인 이종대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20살이던 1955년부터 상습적으로 강도를 저지르다 1957년 경찰에 검거됐고 교도소에서도 교도관을 폭행하여 권총을 탈취하고 교도소를 탈옥했다가 2시간 만에 다시 검거되는 등 전과가 있었다.

문도석 또한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해병대에 입대했다 탈영해 불명예 전역하고 운전기사로 일을 하다 교통사고로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이종대를 만나 의기투합하게 됐다.

이후 여러 건의 크고 작은 범죄를 함께 저지르던 이들은 7월 27일 은행에서 직원 월급을 찾아 나오는 서울의 한 초등학교 직원을 납치한 후 55만 원을 빼앗았다.

하지만 그들이 얻은 결과물은 납치라는 모험치고는 성에 차지 않는 액수였다.

이때 그들은 총기가 있으면 더 크게 한탕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라는 망상에 빠지기 시작했고, 한 달여 뒤 경기도 평택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가 자신들에게 최고의 이상을 충족시켜 줄 거라고 믿으며 M1 카빈총 3정과 120발의 실탄을 절취했다.

문도석이 과거 열쇠 관련 일을 한 적이 있어 그 능력을 범죄에 사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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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이종대와 문도석. sbs '꼬꼬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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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 이어진 범죄…두 번째 살인 이후 잠적 시도

총기로 A 씨를 살해한 1년여 남짓의 시간이 흐른 1973년 7월27일 교직원을 납치해 55만 원을 뺏은 한 달여 뒤 8월 25일 오전 직원들의 월급을 찾아오던 구로공단에 있는 한 회사에 다니는 경리직원의 뒤를 밟아 소총으로 복부를 쏴 살해하고 현금 375만 원을 강탈한 뒤 달아났다.

이때 둘은 살해를 계획하진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문도석의 단순 실수였다. 범행 전 이종대와 함께 총으로 위협만 하기로 모의했지만, 직원이 강력하게 반항하며 달려들자,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우발적인 사고가 발생하자 이들은 차를 버리고 잠적하기로 결심했다.

사고 당일 밤 경찰은 서울 마포구 성산동 골목길에서 수상한 차를 발견했다는 신고를 접수했다.

번호판이 없는 해당 차량에는 "지문채취 열심히 해보슈. X빠지게 됐구나. 진범으로부터"라고 적힌 경찰을 농락하는 듯한 내용이 담긴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이렇게 두 사람, 이종대·문도석의 긴 도주 행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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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수사에 나선 경찰. sbs '꼬꼬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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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뒤 돈 떨어지자, 추가 범행…경찰에 총격 뒤 도주

다시 꼬박 1년 가까이 흐른 1974년 7월 23일, 수사가 오리무중에 빠지던 상황에서 돈이 필요했던 이들은 또 추가 범행을 계획했다.

일당은 먼저 승용차를 빌려 범죄를 물색하기 위해 지방으로 이동하던 중 차를 운전해 준 운전자가 숨겨 뒀던 카빈총을 발견하고 당황하자, 범죄가 발각될 것을 염려해 운전자를 살해한 뒤 경상남도 산청군 야산에 암매장하고 다른 승용차를 탈취했다.

이들은 이틀 뒤 새벽 경기 오산시 일대를 이동하던 중 훔친 차가 고장 나자, 택시를 구하고 나섰다.

이때 이동 중이던 빈 택시 한 대가 둘을 발견했지만, 고장 난 차를 두고 이동하려는 범인들을 수상하게 여겨 이들에게 다시 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자신이 차를 수리해 주겠다며 함께 이동한 뒤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이후 택시 기사는 경찰과 동행해 고장 난 차가 있는 쪽으로 돌아왔고, 경찰이 차 뒷좌석을 검문하려 하자 문도석은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택시 기사와 경찰은 황급히 도망쳤고, 범인들 역시 택시를 운전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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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도석 사망 현장. sbs '꼬꼬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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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적 사항 등 모두 발각…가족들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 끊어

경찰과 택시 기사 총격 사건 이후 이들의 인적 사항이 완벽하게 파악됐고, 경찰이 이들의 연고지에 급파됐다. 각자의 집에서 이 같은 상황을 파악한 둘은 사형을 피하기 위해 자살을 결심했다.

먼저 25일 저녁 9시 30분쯤 피신 중이던 문도석은 구로구 개봉동에서 "나는 이종대의 하수인에 불과했을 뿐이었다"며 "남편을 그래도 끝내 믿어주고 함께 울어준 당신의 애정이 이 순간 눈물 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갑니다. 내가 죽더라도 낙심 말고 좋은 남자와 재혼하여 굳세고 성실하게 살아주기를 바라오"라는 내용의 유서를 아내에게 남긴 뒤 6살 난 장남을 총으로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종대는 문도석이 자살한 지 1시간 만에 인천에 있는 자기 집에서 경찰이 집을 포위하자 먼저 아내와 두 아들을 쏴 죽였다.

이후 경찰은 물증을 자백받기 위해 끈질기고 지루한 대화를 계속 시도했다. 대치 시간이 무려 17시간 30분 넘게 흘렀을 무렵 마지막 총성이 울렸다.

이종대는 그렇게 자기 심장을 향해 마지막으로 소총을 격발하며 모든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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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ws1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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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기고 처절한 악연의 끝…장난감 끌어안고 숨져 있던 두 아들

당시 계단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이종대보다 먼저 아빠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은 두 아들은 장난감 기타와 자동차를 끌어안고 엄마와 함께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들의 최후는 그들이 계획하고 벌인 범죄만큼이나 비정하고 처절했다.

안양교도소에서 처음 만나 서로에게 끌리며 함께 범죄를 저지른 두 사람이었지만, 죽기 전엔 결국 서로를 탓하고 비난하고 원망하며 그렇게 질기고 질긴 악연을 각자 스스로가 종결지었다.

khj80@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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