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기술·강한 규제... '존재론적 도전' 직면"
AI·탈탄소 투자 확대 주문... 실행 여부 '관건'
마리오 드라기(왼쪽)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9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드라기 전 총재가 작성한 '유럽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를 들고 함께 서 있다. 브뤼셀=로이터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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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 등으로 대표되는 미래 산업과 탈탄소 등 핵심 가치에 유럽의 힘을 모아라. 그리고 투자하라. 효율성을 방해하는 유럽연합(EU) 운영 방식도 바꿔라.'
경제 성장 둔화로 고민하는 유럽이 경쟁력을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담은 보고서가 9일(현지시간) 발표됐다. 2011~19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로 일하며 유로존(유로화 사용 국가·당시 19개국) 부채 위기를 타개한 마리오 드라기가 마련한 것이다. 일하는 내용부터 방식까지 전면 개조하지 않으면 유럽이 "존재론적 도전"에 직면할 것이라는 게 '유로존을 살린 슈퍼 마리오' 드라기 전 총재의 섬뜩한 경고다.
유럽 경쟁력 '진단·치료' 맡은 드라기
EU 집행위원회는 이날 드라기 전 총재가 마련한 '유럽 경쟁력의 미래'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지난해 9월 "EU는 경쟁력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며 작성을 의뢰한 것이다. '무엇이든 하겠다'(Whatever it takes)는 발언은 드라기 전 총재가 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 채무불이행(디폴트)에 따른 유로존 붕괴 우려가 제기된 2012년 남긴 "유로존 신뢰 회복을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는 발언에서 따온 것으로, 경쟁력 강화에 대한 EU의 절박함을 보여준다.
AP통신 등에 따르면 드라기 전 총재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오랜 성장 둔화를 유럽은 무시해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2000년 이후 미국의 가처분소득(소비·저축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소득)이 유럽의 두 배 가까이 증가해 유럽이 상대적으로 가난해졌다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다. 인구 감소, 에너지 및 방위 비용 증가, 전 세계적 보호 무역주의 심화 등으로 상황은 더 악화할 소지가 크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9일 발표한 '유럽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 표지. 유럽연합(EU)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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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기업 잘나갈 때 유럽 뭐 했나"
397쪽 분량의 보고서는 세 가지 부분에서 '구체적 행동'을 주문했다.
①보고서는 유럽이 규제 완화 등을 통해 첨단 기술 분야를 키워야 한다고 봤다. "지난 50년간 시가총액이 1,000억 유로(약 148조 원) 이상인 유럽 기업은 나오지 않았으나 시가총액 1조 유로(약 1,480조 원) 이상 미국 기업은 6개가 나왔다"는 게 보고서 내용이다.
②'탈탄소화'가 피할 수 없는 목표라면 오히려 강력한 기준을 만들고 확실하게 실행하라고도 제안했다. 기준을 따르지 않는 역외 기업에 불이익이 돌아가도록 만들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보고서에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EU로 수출하는 역외 기업에 부과하는 탄소 배출 세금)를 역내 기업 보호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③핵심 기술에 대한 대외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도 봤다. 드라기 전 총재는 특히 "반도체 웨이퍼 생산 능력 75~90%가 아시아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행동을 위해서는 연간 7,500억~8,000억 유로(약 1,112조~1,187조 원)의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는 게 보고서 결론이다. 이는 EU 국내총생산(GDP)의 4.4~4.7%에 달하는 규모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유럽 재건 원조 계획인 ‘마셜플랜’(당시 EU GDP의 1~2%)보다 크다. 보고서는 막대한 자금 마련을 위해 민간 투자 및 EU 회원국 간 공동 투자 활성화는 물론, 유로본드의 적극적 발행이 필요하다고 봤다. 유로본드는 유로존 국가들이 연대 보증으로 발행하는 채권이다.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2022년 7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상원 토론회에 참석하고 있다. 로마=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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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운영방식도 비판... 반영 여부는 불분명
'EU 체질 개선'도 주문했다. 느린 의사결정 체계 등이 유럽의 발전을 막고 있다면서다. 드라기 전 총재는 EU 27개 회원국의 만장일치 의사결정 방식이 비효율적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같은 생각을 가진 국가들이 모여 일부 프로젝트를 단독으로 추진하는 방식' 등 유연함을 촉구했다.
보고서 내용은 연말 출범하는 '폰데어라이엔 2기' 정책 수립 시 중요한 참고 사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유로본드 등 주요 사안에서 회원국 간 입장 차이가 크고, 내부 분열도 워낙 해묵은 상태라 얼마나 많은 제안이 실행에 옮겨질지는 불분명하다.
베를린= 신은별 특파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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