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고 있다. 이맘때면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라던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 생각이 난다. '잎새에 이는 바람'('서시')에도 괴로워할 줄 알았던 여리고 섬세한 영혼, 그러면서도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십자가')라고 다짐한 것을 끝내 죽음으로 증명해낸 강인한 투사…. 참회와 저항이라는 상반된 두 얼굴로 우리에게 각인된 시인이 바로 윤동주다.
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당시 넓은 세계를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일본 유학이었다. 일본 대학에 입학하려면 행정절차의 이유로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 유학을 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임에도 윤동주는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그 고뇌가 '참회록'이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라는 문장에서 시인은 창씨개명이 평생을 두고 뉘우쳐야 할 과오임을 분명히 말한다. 이 시를 쓰고 닷새 뒤인 1942년 1월29일,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 창씨개명 신청서를 제출한다.
유학생활 중 쓴 '쉽게 쓰여진 시'에는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뒤로 한 채 침략국에서 공부하며 시를 쓰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이 짙게 배어 있다.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던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용기 삼아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다.
일본 재판부는 윤동주에게 징역을 선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첫째, 어릴 적부터 민족적 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서를 탐독하며 교우에게 감화 등에 의해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둘째, 조선 독립을 위해 과거 독립운동의 실패를 반성하고 그 위에 실력을 배양하고 일반 대중의 문화의식 및 민족의식 함양에 힘써야 한다고 결의했다. 셋째, 징병제도를 실시해 새로운 무기와 군사지식을 체득해 장래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패배에 봉착할 때 민족적 무력봉기를 결행해 독립을 실현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넷째, 문학은 어디까지나 민족의 행복 추구에 있다는 정신에 입각해 민족적 문학관을 강조하는 등 민족의식을 유발했다. …. 일본에는 불경한 범죄 사실이었겠으나 그들이 작성한 이 판결문은 우리로 하여금 뜨거운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게 할 뿐만 아니라 윤동주라는 한 젊은이의 고귀한 생애를 기억하게 한다.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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