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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참을 수 없는 베스트셀러의 가벼움 [S스토리-출판계 '장기 흥행도서'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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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베스트셀러 1위 전달까지 14권

6주간 1위 ‘불변의 법칙’ 최장 기록

사회적 이슈 교체 빨라 ‘무한 경쟁’

팬덤형 도서들, 반짝 뜨는 현상도

“출판기획력·대작 작가 부재 원인”

최장 누적 6주. 올해 상반기 베스트셀러 도서 중 가장 길게 1위를 차지한 ‘불변의 법칙’의 집권 기간이다. 나머지 도서들은 짧게는 1주부터 2, 3주까지 반짝 정상에 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워낙 베스트셀러 목록이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니 출판계에서는 “올해는 메가트렌드가 없는 것이 트렌드”라고 말한다. 출판 시장도 ‘도둑 맞은 집중력’의 시대인 셈이다.

대중이 공감하며 오래 찾는 베스트셀러가 사라진 현상을 다원화와 다양성의 증대로 봐야 할까. 전문가들은 이보다는 시대정신을 건드리는 화제작을 내놓지 못하는 출판사의 기획력 부족, 대작 작가의 부재를 근본 문제로 본다. 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유튜브의 영향력이 커져 팬덤을 거느린 유명인의 저서가 베스트셀러 목록을 잠시 흔드는 현상이 거듭된다고 지적한다.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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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길어야 5주 천하

1월부터 지난달 넷째 주까지 총 34주 동안 올해 교보문고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위 목록을 보면 춘추전국시대가 절로 떠오른다. 이 기간 베스트셀러 1위를 거쳐 간 책은 14권에 달한다.

모건 하우절의 ‘불변의 법칙’(2월28일 출간)은 이 중 최장기인 6주 동안 1위를 기록했다. 이 책은 3월 셋째 주 정상에 오른 직후 잠시 2위로 내려왔다 다시 4주 연속 1위를 탈환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진을 치고 있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지난해 9월7일 출간)는 총 4주 동안 왕좌에 머물렀다. 이 책은 지난해 총 5주간 정상을 차지해, 최근 출판계에서 드물게 ‘쇼펜하우어 열풍’이라 부를 만한 현상을 만들어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인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7월23일 출간)도 지난달 셋째 주까지 4주간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지난해 11월24일 출간)는 1월 마지막주부터 2월 마지막주까지 총 5주간 1위에 오른 후 10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3주 연속 1위를 기록한 책으로는 아동도서인 ‘흔한 남매 16’(4월25일 출간), 유시민의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6월19일 출간)이 있다.

장기 흥행도서의 부재는 2000∼2010년대 출판 시장과 대비된다. 2014년 출간된 ‘미움받을 용기’는 51주 연속 1위에 머물며 ‘아들러 심리학’ 열풍을 불러왔다. 2011년 나온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34주, 2012년 출간된 혜민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31주, 2004년 출간된 ‘다빈치 코드 1’과 2005년 공개된 ‘시크릿’은 30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교보문고 브랜드관리팀 관계자는 “요즘은 대세가 없는 것이 트렌드”라며 “책들끼리도 무한 경쟁의 시대가 됐다”고 진단했다. 이 관계자는 “예전에는 ‘엄마를 부탁해’로 감성적 소설이 함께 주목받거나 정의론이 한동안 화두였다면 요즘은 트렌드가 너무 빨리 바뀌어 우리도 쫓아가기 바쁠 지경”이라고 전했다.

교보문고가 2019년과 올해 6∼7월 주간 종합 베스트셀러 10위권 책들을 비교해 보니 2019년에는 소설, 시·에세이, 인문 등 특정 분야에 베스트셀러가 몰려 있었다. 반면 올해는 문학·인문 외에도 경제·경영, 자기계발, 정치·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나와 독자의 분산된 관심을 보여줬다.

◆팬덤, 인기도서 순위를 흔들다

올해 상반기 베스트셀러 목록의 특징은 팬덤과 SNS의 영향력 확대다. 도서 판매량이 과거보다 줄어든 탓에, 특정 팬덤의 수요가 쏠리면 잠시 순위가 뒤바뀌는 현상이 잦아졌다. 팬덤형 도서는 확장성이 없다 보니 치고 빠지는 식으로 인기도서 목록에 오르는 경향이 있다.

6월 2∼3주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소설 ‘리틀 라이프 1’은 SNS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이 소설은 아시아계 미국 소설가 한야 야나기하라의 작품으로, 어린 시절 학대와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진 변호사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 소설은 2016년 6월 출간됐지만 틱톡 숏폼 등 SNS 덕분에 8년 만에 급부상했다. 책을 소개한 국내 유튜브 쇼츠의 조회 수는 750만회가 넘는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애초에 해외 틱톡에서 시작해 이를 번역해서 소개한 국내 숏폼이 인기를 얻었고, 트위터(현재 X)를 통해 숏폼 내용이 리트윗되면서 더 인기를 끌었다”고 설명했다.

100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버 겸 배우 양유진의 첫 에세이 ‘고층 입원실의 갱스터 할머니’는 3월 넷째 주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가 바로 내려갔다.

팬덤을 거느린 정치인·유명인의 저서도 인기도서 순위를 흔들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배우자 김혜경씨가 2018년 2월 내놓은 ‘밥을 지어요’가 각각 5월과 7월 한 주씩 베스트셀러 정상을 차지했다. ‘푸바오 열풍’ ‘선재 앓이’에 힘입어 관련 책들도 반짝 1위에 올랐다.

유명인이 추천한 책이 주목받는 현상은 더 강해졌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유튜브 채널에서 추천 후 관심이 쏠렸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그룹 아이브(IVE)의 멤버 장원영이 소개해 화제가 됐다.

◆출판사, 근시안적 기획력 바꿔야

서점가에서 장기 베스트셀러가 사라지고 마이크로 트렌드만 나타나는 데는 출판사와 독자, 작가의 문제가 고루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시장에서 담론을 형성할 만한 출판기획력의 부재, 기존에 세상의 흐름·담론을 제시했던 작가들의 실종 때문”이라며 “출판시장의 역동성이 떨어지고 화제작이 분산되면서 신작 중 뚜렷하게 치고 나가는 게 보이지 않는 안갯속”이라고 분석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출판사들이 정확한 타깃 독자를 잡아서 호소력 있는 책을 내고 있지만 이를 뛰어넘어 보편적 공감을 만들어내는 책은 나오지 못하고 있다”며 “(특정 독자 대상의 책은) 팬덤을 넘어 다른 독자들을 끌어들이기에는 매력이 적으니 최근 베스트셀러가 빨리 교체되고 있다”고 말했다.

장 대표는 이런 현상의 가장 큰 책임은 출판사에 있다고 봤다. 그는 “자기 독자를 정확히 알고 정확히 마케팅하면 단기 베스트셀러는 만들어낼 수 있지만 많은 독자에게 호소할 확장성은 갖지 못할 것”이라며 “그러니 오히려 큰 상상력을 가진 책이 줄어드는 것 아닌가”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출판사들이 사유의 힘을 가진 큰 책을 기획해야 한다”며 “편집자를 괴롭히면 고만고만한 책만 나오니, 이들이 모험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작가층의 문제도 있다. 백 대표는 “아마추어를 포함해 책 쓰는 사람의 숫자는 늘어났으나 좋은 책을 쓸 만한 필자층 자체는 얇아졌다”며 “출판사들도 예전에는 ‘글’을 우선시해 필자를 발굴했지만 이제는 유튜버 등 판매력을 가진 필자를 찾는 걸 우선시하는 경향이 현저해졌다”고 전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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