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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화)

의료공백 장기화에 변화하는 여권 기류 [여의도가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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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앞두고 ‘응급실 대란’ 우려가 고조되는 가운데 의료개혁을 둘러싼 여권 기류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6일 의료 공백 불안 해소를 위한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야당이 제안한 ‘여·야·의·정 비상협의체’와 명칭만 조금 다를 뿐 취지는 대동소이하다. 여야와 의료계,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의료개혁 방향과 의료대란 해소 방안 등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만시지탄”이라며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등을 요구하면서도, 협의체는 “즉시 가동하자”고 했다.

대통령실은 한 대표의 협의체 제안을 긍정 평가하면서 ‘제로베이스(원점) 논의’도 가능하다고 했다. ‘원점 논의’는 그간 쓰지 않았던 표현이다. 제5차 윤·한(윤석열·한동훈) 갈등의 계기가 된 ‘2026학년도 증원 유예안’에도 열린 태도를 보였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대통령실 태도가 전향적으로 변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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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한 상급종합병원에서 의료관계자들이 응급실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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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유예안 안 돼”에서 “원점에서 검토”까지…격랑의 열흘

불과 10여일 전만 해도 여권 내부 분위기는 험악했다. 한 대표는 지난달 25일 고위당정협의회에서 한덕수 국무총리를 통해 2026학년도 증원 유예를 제안했지만, 대통령실은 원안을 고수하겠다며 거부했다.

한 대표가 제안 사실을 공개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는 데 대해 불쾌해하는 기색도 감지됐다. 지난달 30일로 예정됐던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도부 만찬이 갑자기 연기됐다. 윤 대통령은 매년 참석해오던 국민의힘 연찬회(8월29일)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사이 윤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윤 대통령은 “비상진료체계가 원활히 가동되고 있다”며 의료대란 가능성을 부인했다. “현장을 한 번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도 했다. 추석 응급의료 위기설이 퍼지던 시점이라 논란이 됐다.

여당 연찬회장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비서관 등이 ‘의료개혁’ 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여당 의원들은 정부의 안일한 인식을 지적하면서 대책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정부의 의료개혁 성공을 위해 당·정이 똘똘 뭉치자는 취지로 준비된 보고회였지만,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됐다는 얘기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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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우원식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의 응급실 현장 방문이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지난 4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안암병원을 찾았다. 그는 “한숨 소리가 서로 많았다”며 “근본 대책을 신속하게 수립하지 않으면 의료현장이 심각한 붕괴 상황에 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의료개혁 주무 부처인 복지부 박민수 2차관의 발언은 의료 공백을 우려하는 민심에 불을 질렀다. 박 차관은 4일 라디오에 나와 응급실 이용 자제를 당부하며 “(환자) 본인이 전화할 수 있는 상황, 고열·복통 등은 경증”이라고 했다.

그후 여당 내에서는 의료개혁 주무부처 책임자들이 대통령 눈을 가리고 국민을 실망하게 한다며 ‘문책론’이 계파를 가리지 않고 터져 나왔다.

친한계 김종혁 최고위원은 5일 “대통령에게 모든 게 괜찮을 거라고 보고한 데 대해, 국민을 이토록 불안하게 만든 데 대해, 정책을 수시로 바꿔 정부 신뢰도를 떨어트린 데 대해, 막말과 실언으로 국민을 실망 시킨 데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당사자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기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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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 국민의힘 의원.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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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 의원은 “이미 (의·정)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할 신뢰 관계가 완전히 깨졌다. 이제는 새 (협상)판을 짜줘서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재섭 의원도 “혹시나 아이가 아플까 봐 엄마, 아빠들은 발만 동동 구른다”며 “대통령과 정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의료대란은 현실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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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이송 거부 등으로 응급 환자가 적시에 치료받지 못하는 사례, 각 병원 응급실 축소 운영 소식이 잇따르며 여론은 악화해 갔다. 6일 공개된 한국갤럽 정례 여론조사(3∼5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1명 대상, 무선전화 가상번호 전화 조사원 인터뷰 방식,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3.1%p,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 따르면 윤 대통령 부정평가 이유로 ‘의대 증원’이 처음 1위를 차지했다. 의료 공백 사태에 대한 정부 대응을 두고는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이 64%나 됐다. 특히 의료 공백 사태로 ‘아플 때 진료받지 못할까 봐 걱정된다’는 응답이 3월 2주차 69%에서 이번에 79%로 늘었다.

설령 추석 연휴를 무사히 넘기더라도 그 이후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의사 출신 개혁신당 이주영 의원은 6일 BBS라디오에서 “날씨가 서늘해지고 겨울이 오면 기본적으로 모든 질병이 증가한다”며 “이미 최전방 응급의학과, 필수 의료과 의사들이 탈진한 상태여서 올겨울을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겠는가 걱정이 많이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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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성남시 한 병원 응급의료센터 앞에 응급실 진료 지연 관련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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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에서 “내년 증원 재검토” 주장도

격랑의 열흘이었다. 한 대표의 협의체 구성 제안은 이런 과정을 거쳐 나왔다. 이번에는 당·정 간에 조율도 거친 것으로 보인다. 한 대표는 “대통령실에서도 공감하는 사안으로 안다”고 했다.

대통령실은 즉각 긍정 입장을 내놨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의대 정원 문제는 의료계가 합리적 안을 제시하면 언제든 ‘제로베이스(원점)’에서 논의하겠다”고 덧붙였다.

우원식 국회의장도 대통령실의 전향적 태도를 “국민과 함께 환영한다”고 했다. 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주무부처 책임자 문책 및 경질 등을 요구하기는 했지만, 협의체 구성에는 응할 것으로 보인다.

관건은 의료계가 협의체 구성을 받아들이느냐 여부다. 대통령실은 “의료계가 대화 테이블에 나오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지점이 하나 있다. 이미 약 1500명 증원이 결정된 2025학년도 의대 정원에도 손을 대자는 주장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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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지난 4일 민주당 의료대란대책특위와 함께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을 방문, 추석명절 의료 대응 여력 등을 살핀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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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의료대란대책특위는 “의료진의 현장 복귀와 의대 교육 정상화를 위해 2026년 정원 재검토에 국한하지 않고 정원 규모의 과학적 추계와 증원 방식을 포함한 폭넓은 논의가 필요하다”며 “의료대란을 해소할 모든 방안을 열어두고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위 박주민 위원장은 기자들과 만나 “최대한 참여 가능성의 폭을 넓히기 위해 2025년도 정원도 굳이 배제할 필요 없다는 말씀까지 드린 것”이라고 했다.

박 위원장은 앞서 CBS라디오에 나와 ‘개인적 견해’라는 전제를 달고 “의료대란이 갖고 오는 위험성과 국민 피해가 굉장히 크다”며 “의학교육평가원이 의대 교육 상황을 평가하게 돼 있는데, 부적격 판단을 하면 의대를 졸업해도 국시(의사 국가시험)를 볼 수가 없다”고 2025학년도 증원 재검토 필요 이유를 제시했다. 집단 유급과 증원이 겹쳐 의대 교육이 부실해지면 문제가 더 커진다는 지적이다.

이는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도 앞서 주장했던 내용이다. 안 의원은 4일 라디오에서 응급실 현장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면서 2025학년도 의대 증원부터 유예해 의료 시스템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주장은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은 더 이상 논의할 수 없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한동훈·이재명 대표 회담 결과와 상충된다.

더 큰 문제는 이미 증원 숫자가 결정된 2025학년도 정원을 건드릴 경우 반수생을 중심으로 대입 피라미드의 ‘꼭짓점’ 격인 의대에서부터 ‘연쇄 대이동’이 예상되던 입시 현장이 ‘대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11월14일)은 두 달여 앞으로 다가왔고, 당장 다음주부터 수시 원서 접수가 시작된다. 수험생과 학부모 반발을 무릅쓰고 정부가 2025학년도 정원을 손대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대해 안 의원은 열경련이 발생해 위급 상황에 빠진 2세 여아가 응급실 11곳에서 진료를 거부당한 끝에 의식불명에 빠진 사례를 언급하며 “정부가 국민을 위해 하는 중요한 일 두 가지 ‘죽고 사는 일’과 ‘먹고 사는 일’ 중에 죽고 사는 일이 당연히 중요하다”고 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엄청나게 큰 손해가 오겠지만 입시 혼란보다는 의료 공백을 막는 게 더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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