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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일)

[여적] ‘짝퉁’ 평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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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리 어딘가?” “지금 ‘거래처’인데요.” “그래, 수고하게.”

‘거래처’라는 술집 이름에 직장 상사가 속아 넘어간다는 에피소드 한 도막이다. 비슷한 일이 교육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국학력평가원’, 일개 사설 출판사이지만 공공기관을 연상케 한다. ‘평가원’으로 축약하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주관하고 교육과정·교수학습·교육평가 분야의 연구를 수행하는 국책연구기관 ‘한국교육과정평가원’과 헷갈린다. 이 회사가 최근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만들었다. 교육부 검증을 통과했지만 친일 인사와 이승만 독재 옹호, 일본군 위안부 축소 서술 등으로 논란이 일고 있다. 19세기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는 ‘우세한 경제력과 군사력’ 등으로 표현해 강대국의 논리를 반영했다는 지적도 받는다. 세월호 참사의 국가적 책임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비판, 예전 국사 교과서 내용을 표절했다는 의혹에도 휩싸여 있다. 집필자 중 한 명은 이주호 교육부 장관 보좌역으로 활동한 것으로 드러났다.

거창한 이름과 달리 이 회사는 출판업계나 교육계에서 ‘듣보잡’이다. 교육부의 교과서 검정 공고 이후 지난해 ‘한국사2 적중 340제’라는 수능 기출 문제집을 한 권 발행한 것이 거의 전부다. 상법은 “부정한 목적으로 타인의 영업으로 오인할 수 있는 상호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상표법은 “공공기관이 사용하는 기호와 동일 또는 유사한 상표를 사용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회사 이름에 ‘한국’ ‘평가원’ 같은 단어가 들어갈 수 있는지 의문이다. 지금도 ‘한국교육평가원’ ‘한국학력개발원’ ‘한국교육개발연구원’ 등 공공기관 유사 상호로 창업할 수 있다는 의미인가.

교과서는 경전이 아니다. 완벽하고 가치 중립적인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하나의 교과서보다 여러 교과서를 허용해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고 학생들에게 다양한 역사관을 습득하게 하는 게 보다 현실적이고 바람직하다. 역사 교과서 검정제도를 도입한 것도 이런 취지에서다. 소규모·신생 출판사도 얼마든지 교과서를 만들 수 있다. 다만 검증은 철저히 해야 한다. ‘짝퉁 평가원’이 낸 부실한 책으로 우리 미래세대가 역사를 공부하게 할 순 없다.

경향신문

한국학력평가원이 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표지. | 국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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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민 논설위원 risk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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