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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한국사 교과서 합격' 출판사, 알고보니 자격 요건 조작...평가원의 부실 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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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3월 신학기부터 학교 현장에서 사용될 새 검정 교과서가 공개된 가운데,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검정에 합격한 한 출판사가 검정 신청 자격을 의도적으로 조작한 증거가 드러났다. ‘무자격 출판사’를 검증하지 못한 교육당국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의혹으로 얼룩진 '뉴라이트' 논란 교과서 발행 출판사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30일 관보를 통해 2022 교육과정을 반영한 초·중·고교 교과서 검정 결과를 공고했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검정에서는 9곳의 출판사가 합격했다. 이 가운데 한국학력평가원(학력평가원)이라는 출판사는 이번에 처음으로 교과서 검정을 신청해 합격한 곳이다. 여기에 검정 결과 발표 전부터 뉴라이트 성향의 필진이 모여 교과서를 집필 중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교과서 업계와 교육현장의 관심은 학력평가원으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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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력평가원 사무실
뉴스타파는 학력평가원의 교과서 검정 신청 배경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출판사가 검정 신청에 필요한 ‘출판 실적’을 허위로 꾸며낸 사실을 확인했다.

출판사가 교과서 검정을 신청하려면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제시하는 두 가지 자격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첫째, 2020년 12월 12일 이후 최근 3년간 검정을 신청하는 교과와 관련된 도서를 1권 이상 출판한 실적을 증빙해야 한다. 둘째, 관련 교과를 전공했으며, 검정 대상 교과서를 전담할 편집자가 근속 중이어야 한다.

지난해 1월 교육과정평가원은 새 교과서 검정을 실시한다는 공고를 냈다. 이 시점 학력평가원은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였다. 2022년 1월 이후로는 출판 실적이 전무했다. 재무상태 자료를 보면 당시 학력평가원은 경영난에 빠져 있었다. 2021년에는 영업이익율이 약 -56%로 매출액 3억 4000여만원 대비 영업이익은 1억 9000만 원의 손실을 안았다.

한국사 교과서 검정을 신청하기 직전 연도인 2022년에도 1억 5천만 원이 넘는 손실을 기록했다. 자산총액은 6억 원 안팎에 불과한데 부채총액은 24억 원에 이르렀다. 사설 기업신용평가업체는 이 출판사를 분석한 보고서에서 “상거래를 위한 신용능력이 보통 이하이며 거래안정성 저하가 예상되어 주의를 요하는 기업”으로 평가했다. 업계에서는 검정 교과서 개발·발행에 수억 원대 비용이 소요되는 것으로 보는데 학력평가원은 후발주자로서 도전할 만한 재정적 여력이 없는 상태였다.

더구나 학력평가원은 2010년 이후로는 이번 검정 신청과도 관련된 역사계열 도서를 발행한 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교과서 검정 실시 공고가 나자 행보가 달라졌다. 검정 실시 공고가 난 뒤 6개월이 지난 지난해 7월, 학력평가원은 돌연 ‘한국사2 적중 340제’라는 수능 기출 문제집 한 권을 발행하기로 하고, 사람의 주민등록번호 격인 ISBN(국제표준도서번호)를 받은 기록이 확인된다. 이후 이 문제집의 인쇄본을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용으로 제출했다.

현행 법령상 출판사가 인쇄용 도서를 발행하게 되면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용으로 제출해야 하는, 납본 의무가 생긴다. 따라서 법령상 이 납본 의무를 완료한 기록은 출판 실적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물증이 될 수 있다.

뉴스타파는 국회 교육위원회 강경숙 의원실의 도움을 받아 학력평가원이 교육과정평가원에 제출한 자격 요건 증빙 자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학력평가원은 지난해 한국사 수능 기출문제집을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하고 받은 증명서를 교육과정평가원에 제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즉, 학력평가원은 지난해 문제집 1권을 발행한 기록으로 최근 3년 사이 검정 신청 교과 관련 도서를 1권 이상 출판해야 한다는 자격 요건을 충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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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력평가원은 2023년 ‘한국사2’라는 서적을 발행해 중앙도서관에 납본한 실적을 교과서 검정 신청 요건 증빙자료로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제출했다. (강경숙 의원실 제공)
뉴스타파, 해당 출판사 검정 심사 자료 조작 확인
그런데 뉴스타파가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된 학력평가원의 한국사 문제집 실물을 검토해보니, 최신 수능 기출문제집이라고 믿기 어려운 수상한 점이 드러났다. 이 문제집의 실물은 현재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서고에 보관돼 있다. 지난해 출판된 문제집인데도 속지에는 ‘2008 수능 완벽 대비서’로 소개돼 있으며, 실제로 2007 수능 기출 문제까지만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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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력평가원이 교과서 검정 신청 시 출판 실적으로 제출한 2023년판 한국사 수능 기출 문제집 속지에 ‘2008 수능 완벽 대비서’라는 소개가 적혀 있다.
이 문제집은 현행 2015 교육과정 시행 이전에 제작된 정황이 뚜렷하다. 목차를 보면 한국 근현대사의 이해, 근대 사회의 전개, 민족독립운동의 전개, 현대사회의 발전 순의 4개의 대단원 아래 세부 단원이 배열돼 있다. 이는 1997년 고시된 7차 교육과정상 사회과 과목 한국근·현대사의 단원 구분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현재는 과거 근·현대사 교육과정이 한국사라는 단일 과목에 통합돼 있으므로 최신 교재라면 현행 한국사 교육과정을 반영해 제작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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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력평가원은 2007년 발간한 한국근현대사 문제집(오른쪽)의 표지만 바꿔 지난해 한국사2 적중 340제라는 제목의 수능기출문제집을 발행했다.
이 같은 의혹은 취재팀이 학력평가원의 옛 문제집 한 권을 입수하면서 풀리게 됐다. 취재팀이 입수한 문제집은 ‘엑시트 한국근·현대사 340제’라는 제목으로 2007년 1월 학력평가원에서 출판된 책이다. 2023년판 문제집과 2007년판 문제집 실물을 대조한 결과, 내용과 구성, 문장뿐 아니라 쪽번호까지 모두 같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학력평가원은 2007년판 문제집의 속지는 그대로 인쇄한 뒤, 앞뒤 표지만 새것으로 붙여 재활용한 것이다. 뉴스타파는 취재 과정에서 2023년판 문제집이 시중에서 판매되거나 품절·절판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었는데 학력평가원은 애초부터 판매 목적이 없는 가짜 문제집을 찍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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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력평가원의 2023년 한국사 수능 기출 문제집(왼쪽)과 2007년 한국근·현대사 문제집을 펼쳐보면 같은 페이지에 같은 문제들이 실려 있다.
결국 학력평가원의 행각을 요약하면 이렇다. 먼저, 표지만 바꿔치기 하는 수법으로 17년 전 출판했던 교재를 최신 개발 교재인 것처럼 발행 등록을 하고 인쇄본을 제작했다. 그렇게 거짓으로 제작한 출판물을 시중에는 유통하지 않은 채 국립중앙도서관에만 납본하고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바로 이 납본 증명서를 이용해 교과서 검정 신청 자격을 얻어내 최종적으로 교과서 검정에 통과했다. 그리고 검정 합격 결과가 발표된 현재까지 검정당국과 학생, 교사에게 자신들의 사기 행각을 숨겼다.

학력평가원의 한 관계자는 전화통화에서 “교과서와 문제집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며 “다른 편집자들이 모두 부재중이라서 연결해줄 수 없다”는 취지의 답변만 반복했다. 취재팀은 29일 인천 연수구 학력평가원 사무실도 방문했으나, 임직원을 만나지 못했고 더 이상의 해명은 듣지 못했다.

교과서 검정을 주관하는 교육과정평가원은 출판사 자격을 부실하게 검증했다는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재 평가원은 검정 신청 출판사가 자체적으로 제출하는 출판·납본 목록만을 근거로 출판 실적을 심사하고 있다. 실제 출판물의 인쇄본이나 전자파일을 제출받아 검토하는 등 실질적인 확인 과정은 생략한다. 교육과정평가원 측은 이번 교과서 검정에서도 문제 없이 출판사 자격 심사를 마쳤다는 입장이다. 교육과정평가원 교과서검정팀 관계자는 뉴스타파와의 통화에서 “(출판사들로부터) 검정 실시 공고에 안내한 서류를 제출 받았고, 지난해 10월 검정 신청 설명회를 통해서 증빙 자료를 어떻게 제출하는지, 어느 기관의 것을 내야 하는지 다 안내했기 때문에 그것을 다 확인하고 검정 신청을 받았다”고 말했다.

교육당국, 부실 검증인가 의도적 봐주기인가
향후 교육과정평가원의 ‘봐주기 심사’ 의혹은 철저하게 내막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새 교과서 검정 과정은 논란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교육과정평가원은 지난 3월 13일 교과서 검정 본심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발표일을 불과 열흘 앞두고 한 달 이상 발표를 연기했다. 이후 다시 한 차례 발표일을 엿새 앞당기기로 했다. 당시 교육과정평가원과 교육부 측은 검토기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는 취지로 해명했으나, 교육 현장에서는 교과서 검정 결과 발표 일정을 두 차례나 변경한 것은 유례가 없다고 평가했다.

이번 주 실시된 검정 교과서 전시본 배송 과정에서도 문제가 터졌다. 전시본들은 11개의 박스에 나눠 포장돼 학교 현장으로 일괄 배송됐는데, 한국사1, 2 교과서가 담긴 박스만 빠진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 전시본이 담긴 박스는 나흘이나 늦게 배송됐다. 이러한 사건의 배경으로 교육과정평가원이 특정 출판사, 즉, 뒤늦게 검정을 신청한 한국학력평가원에 교과서 오류 수정 시간을 벌어주고 제작 일정에 편의를 주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강경숙 의원(조국혁신당)은 “가장 우선적으로 검토했어야 할 출판사의 자격 문제에 대해 평가원이 이렇게 허술하게 대응했다는 것은 고의성이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며 “교육부는 명확한 관리·감독의 책임을 갖고 자격을 재검증한 후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교육부가 검정 신청 자격을 조작한 사실이 드러난 학력평가원에 실질적인 제재 처분을 내리게 될지도 주목된다. 대통령령인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 제38조에 따르면 ‘저작자 또는 발행자가 이 영 또는 이 영에 의한 명령에 위반하였을 때’나 ‘검정도서로 존속시키기 곤란한 중대한 사유가 발생한 때’에 교육부장관은 검정 합격을 취소하거나, 1년 이내 범위에서 발행 정지 처분을 내릴 수 있다.

취재: 홍우람 최기훈 홍여진 조원일

촬영: 김희주 신영철

출판: 허현재

디자인: 이도현

뉴스타파 홍우람 wooramhong@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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