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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성폭력 당했다, 도와달라”…그 애는 말할 권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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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학내 성폭력 문제 등을 고발한 스쿨미투를 지지하는 시민모임과 청소년인권단체 회원들의 기자회견 모습.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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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사랑에 대한 십대들의 이야기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지음 l 바다출판사(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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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에 쓴 일기장을 펼쳤다. 11월14일 일기에 눈길이 멈췄다. 학교에서 성교육 비디오를 본 저녁, 일기장에 꽉 채워 적은 교훈들. 숫자를 매겨 적은 실천 목록은 단순했다. ‘혼자 다니지 말기. 화장실 같이 가기. 아무에게나 문 열어주지 말기.’ 비디오 속에는 조심하지 않아서 성폭력을 당한 뒤 불행해진 ‘이름 모를 아이’가 있었고, 어린 나에게 그 아이는 조심성 없어서 ‘당한’ 불쌍한 모습으로 기억에 박혔다.



열다섯 살 여름밤, 친구와 함께 노래방에 갔다. 소찬휘의 ‘티어즈’(tears)와 자우림 노래를 부르며 방방 뛰면 가족과 학교에서 느끼는 압박감이 풀렸다. 노래방은 지하에 있었고, 화장실은 1층 구석진 복도에 있었다. 여자, 남자 칸이 나란히 나누어진 화장실이었다. 친구가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복도에서 기다리는데, 한 남자가 몸을 비틀대며 다가왔다. 30대 초중반으로 보인 그는 갑자기 나를 남자 화장실 칸으로 밀었다. 나를 압박하고 순식간에 몸을 더듬었다. “정아!!” 나는 친구를 불렀고, 친구가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소리 지르자 남자는 나를 풀어줬다. 그는 “좋은 친구 둬서 좋겠네”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하나도 불안해 보이지 않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지만,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신고할 생각은커녕,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왜 그 시간에 밖에 다녔냐, 혼날 것 같았다. 비밀이어야 했다. 친구도 나도 성폭력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만 듣고 자랐지 막상 그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대신 혼잣말을 자주 했다. ‘내 몸을 지키지 못했다. 친구와 함께 화장실에 간 건 맞지만, 같이 들어가지 못했으니 내 잘못이다. 애초에 노래방에 가면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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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고 20년이 지났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나는 성폭력을 다르게 인식한다. 내가 배운 성교육을 의심한다. 피해자를 향해 ‘조심하라’ 말할 게 아니라, 가해자에게 ‘그건 폭력이야’ 알려주는 성교육을 받았어야 했단 사실을. 영상 속 ‘그 애’가 그런 식으로 비디오에서 재현되어서는 안 됐다는 사실을. 그 애는 ‘저 성폭력을 당했습니다. 도와주세요’ 말할 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피해를 당한 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으며, 만약 그 순간 나를 비난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 역시 폭력이라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 몸이 소중하다면, 폭력으로 인해 더럽혀졌다고 나를 향해 분노하는 게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범한 당신과 세상을 향해 분노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가끔 청소년들과 만날 기회가 생기면, 요즘 성교육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묻곤 한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거나 정자 난자 결합 비디오라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지난날의 무지와 상처가 나를 쿡 찌른다. 아니야, 수치심은 네 몫이 아니야.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는 금기가 되어선 안 돼. 금기일수록 더 위험해지는 이야기가 있어. 우리는 성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니까 다시 쓴다는 말은 거짓말.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 내가 뒤늦게 배운 성교육 선생님은 청소년이었다. ‘부끄러울 것도 죄지은 것도 없는 십대를 위한, 십대에 의한, 십대의 성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책. ‘연애와 사랑에 대한 십대들의 이야기’. 기존 관념을 지우고, 우리는 다시 배워야 한다. 뭘 모른다고 여기는 생생한 청소년의 현실에서부터, 다시, 다시.



홍승은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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