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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이슈 미술의 세계

고려 청자·조선 민화 차용한 초상화…니콜라스 파티 한국 첫 개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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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출신 니콜라스 파티
용인 호암미술관서 개인전
회화·조각 48점 대규모 전시
韓 고미술 소장품 직접 골라
파스텔화로 재해석해 제작
미술관서 6주간 벽화 작업도
“낯설었지만 좋은 배움 기회”
내달 ‘프리즈 서울’에도 출품


매일경제

스위스 출신 작가 니콜라스 파티의 ‘청자가 있는 초상’(2024). 리움미술관 소장품인 고려 청자 ‘청자 동채 연화문 표형 주자’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작품이다. 호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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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없이 옆을 보고 있는 사람의 상반신이 다름 아닌 청자 주자. 당나라 팔선(八仙) 중 하나로 전해지는 신선 이철괴(李鐵拐)의 호리병 형태로 만든 고려 청자다. 비현실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이 초상화는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스위스 출신 작가 니콜라스 파티(44) 작품이다. 청자의 색과 조형은 리움미술관의 소장품인 고려 청자 ‘청자 동채 연화문 표형 주자’에서 차용했다. 평소 파스텔을 재료로 파블로 피카소 등 서양미술사의 거장들 작품을 재해석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온 그는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한국 고미술로 작업했다.

그의 국내 첫 개인전 ‘니콜라스 파티: 더스트’가 8월 31일부터 내년 1월 19일까지 용인 처인구 호암미술관에서 열린다. 한국 고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파스텔화 신작 20점과 해당 고미술품, 파티의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회화·조각 48점을 선보인다. 파티가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6주 간 미술관에 머물며 직접 미술관 로비와 전시실 내부 벽면에 그린 대형 파스텔 벽화 5점도 만날 수 있다. 이 역시 조선시대 민화나 도자기 등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전시 기간에만 존재하고 폐기된다.

전시 개막을 이틀 앞둔 29일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파티는 “전시 기획 초기 단계부터 한국의 예술품을 전시에 함께 포함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한국의 오랜 역사와 복잡한 매체, 이미지를 담고 있는 고미술 컬렉션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며 “처음엔 낯설기도 했지만 굉장히 좋은 배움의 기회가 됐고, 제가 잘 알지 못했던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다”고 밝혔다. 호암미술관이 동시대 현대미술로 대규모 전시를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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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용인 호암미술관이 공개한 스위스 출신 작가 니콜라스 파티의 한국 첫 개인전 전경. 한국 고미술에서 영감을 받은 파티의 회화 신작 ‘청자가 있는 초상’(2024·왼쪽)이 걸린 벽면의 문 너머로 함께 전시된 작자미상의 18세기 후반 조선 민화 ‘십장생도(十長生圖) 10곡병’이 일부 보인다. 전시는 오는 31일 개막한다. 용인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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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조선시대 백자 ‘백자 태호’ 뒤로 니콜라스 파티의 벽화 ‘동굴’(2024)이 펼쳐졌다. 파티는 ‘백자 태호’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초현실적인 동굴 풍경을 그렸다. 호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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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는 삼성문화재단과의 협업을 통해 전시에서 함께 선보일 한국 고미술품을 직접 선정했다. 그는 “준비 과정에서 제가 몇 가지 제안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달항아리가 어떻겠느냐고 한 적이 있는데, 큐레이터께서 달항아리는 서양 사람들이 뻔하게 고를 법한 작품이라면서 ‘백자 태호’를 추천해해 줬다”고 말했다. 파티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조선시대 백자 ‘백자 태호’를 모티브로 9m 폭의 대형 벽화 ‘동굴’(2024)을 그렸다. 벨기에의 상징주의 화가 윌리엄 드구브 드 뉭크가 하나의 색조로 동굴의 깊이를 표현한 점을 참조해 비슷한 방식으로 초현실적인 동굴 풍경을 담은 이 작품은 ‘백자 태호’ 뒤 벽면에 그려져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전시됐다.

작자미상의 18세기 조선 민화 ‘십장생도(十長生圖) 10곡병’과 함께 전시된 파티의 또 다른 신작인 사계절 풍경화 4점(봄·여름·가을·겨울 풍경)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자연의 숭고함을 이야기한다. 십장생도는 해, 구름, 산, 바위, 물, 학, 사슴, 거북, 소나무, 불로초 등 장수를 상징하는 열 가지 소재의 조화로운 모습을 상상해 그린 한국 고유의 회화 장르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상적인 관점을 보여 준다. 파티는 이 점에 착안해 사계절을 관통하는 자연 속의 변함없는 한 장소를 표현했다. 인간의 흔적이 전혀 없어 이 풍경은 인류 이전의 모습인지 이후의 모습인지 알 수 없다.

전시는 이런 병치를 통해 시대와 문화를 넘나드는 대화를 촉발한다. 특히 조선 시대 ‘십장생도 10곡병’과 김홍도의 ‘군선도’ 속 다양한 상징들을 재치있게 샘플링해 상상의 팔선을 형상화한 신작 초상 8점은 시간을 건너 관객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금박으로 덮인 아치형 프레임에 담긴 초상은 사슴과 학, 당나귀 등으로 몸이 대체돼 있거나 개를 머리카락 삼기도 하고, 복숭아와 연꽃이 가득한 화면으로 스며들어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 지구상에서 멸종된 공룡을 손바닥 만한 동판에 온순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담아낸 ‘공룡’ 연작은 ‘청동운룡문 운판’에 재현된 상상의 동물이자 불법을 수호하는 용(龍)의 이미지와 맞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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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파티의 사계절 풍경화(2024·왼쪽부터 여름, 가을, 겨울, 봄)가 작자미상의 18세기 조선 민화 ‘십장생도(十長生圖) 10곡병’(오른쪽)과 함께 전시돼 있다. 모두 시공간을 초월하는 자연의 숭고함을 이야기한다. 용인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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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제목의 ‘더스트’는 먼지처럼 공기 중으로 흩날리는 파스텔의 고유한 특성을 의미한다. 작가는 파스텔화를 ‘먼지로 이루어진 가면(mask of dust)’에 빗대며, 캔버스에 화장을 하듯 파우더로 덮인 환영을 만든다. 이런 파스텔의 불안정성을 인간과 비인간, 문명과 자연의 지속과 소멸,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로 확장하고자 하는 것이다. 미술관 벽에 직접 그린 거대한 파스텔 벽화를 전시 기간 동안에만 존재하고 사라지도록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파티는 “파스텔을 회화 재료로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2013년이다. 피카소가 여인의 두상을 그린 파스텔 초상화를 보고 푹 빠졌다”며 “스코틀랜드에서 지내다 스위스로 돌아가 피카소 그림 엽서를 구매해 따라 그리는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파스텔화를 그리게 됐다. 파스텔 작업은 열정, 사랑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파티는 전시 공간 연출에도 적극 참여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전시 공간은 중앙에 회랑을 두고 여러 개의 아치 문을 통해 서로 다른 방을 연결하는 구조다. 방 안의 방처럼 통로를 따라 걸으면서 마주하는 공간들은 서로 다른 느낌과 색채로 관객을 맞는다. 한편 스위스 갤러리 하우저앤워스 전속 작가인 파티는 오는 9월 4일 서울 코엑스에서 개막하는 ‘프리즈(Frieze) 서울’에도 참가해 신작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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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파티가 이번 개인전을 위해 용인 호암미술관에 6주 간 머물면서 작업한 벽화 신작 ‘폭포’(2024)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호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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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파티의 개인전이 열리는 용인 호암미술관 전경. ‘주름’ ‘곤충’ 등 연작이 전시돼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전시 공간은 중앙에 회랑을 두고 여러 개의 아치 문을 통해 서로 다른 방을 연결하는 구조다. 용인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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