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늦은 밤 시간 텔레그램 딥페이크 ‘기자 합성방’이 생겼다. 그 직후 이 방에서는 “기사 내기만 해봐”라며 “합성러(합성 가능한 사람) 모집해서 기사 낸 기자와 뉴스 앵커 다 딥페이크 해버리고 싶다”는 발언이 쏟아졌다. 최근 급속히 확산하는 딥페이크 범죄가 기자 등 언론계 종사자들에게까지 확산하면서 언론 보도를 위축하고, 언론 자유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기자 합성방에서는 “기자들도 당해봐야 헛소리 작작쓰지. 딥페이크 기사 다룬 기자들 목록방도 만들어줘”라거나 “OOO 기자님부터 지능(지인능욕) 해줘야되나”, “사진만 구하면 바로 제작 들어간다”라며 특정 언론사명, 기자 이름을 콕 집어 거론하고 사진과 신상을 올리도록 부추기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일부는 딥페이크 기사를 쓴 기자들의 신상이 떴는지 궁금해하며 누군가 그런 내용을 올려주면 딥페이크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얼마 안 돼 복수의 여성 기자 사진이 이 방에 올라왔고, 외모에 대한 조롱이 이어지더니 이내 피해자의 얼굴을 성적인 이미지와 합성한 사진이 생성됐다. 그리고는 “저 정도면 쟤도 좋아하겠는데? 몸매 좋아졌는데”라고 하기도 했다. 방이 만들어진 지 2∼3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 이용자가 “꼴리는 젊은 기자 있는데”라고 하자 다른 이들이 누구냐고 궁금해했고, 얼마 안 돼 여성 기자의 이름이 적힌 명함을 비롯해 여러 장의 사진이 업로드됐다.
관련 기사를 썼던 기자 중 남성이 있다는 것도 언급하며 “남자라고 (능욕) 못할 거도 없지. 남녀평등”이라더니 “남자기자는 취재하는 거니까 지능사진 당당히 볼 수 있는 거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남자기자님 꼴리는 지인여기자 이름 좀 말해봐요“라며 “여기 말하시면 합성가능”이라고 했다.
이곳에선 29일 아침까지도 기자 사진을 수소문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들은 최근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가 공론화된 직후인 분위기임에도 언론과 경찰 등을 도발하는 발언을 일삼고 있다. ”이제 기사도 별로 안 나온다”며 “기자들이 단물 다 빨아먹고 버렸냐”거나 “경찰은 손가락 빨고 있냐”며 조롱을 서슴지 않았다.
◆“가해자들, ‘절대 안 잡힌다’며 당당…성적 호기심보다 지배욕 때문”
함께 이 방 상황을 관찰한 활동가 A씨는 “이전 사례들을 고려해 보면 방 참여 인원이 급증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며 “수백 명 수준에서 수천 명이 되는 데에 며칠이 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공론화 당사자와 시민, 전문가들은 가해자들의 ‘자신감’이 디지털 성범죄에 관대해 온 국가의 미온적 대처에서 비롯됐으며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씁쓸해하고 있다.
붙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딥페이크 제작만으로는 처벌이 힘든 입법 공백 상황, 설사 수사망에 오르더라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거나 단순 접속 유지로는 단죄받지 않고 넘어간 이전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등이 종합적으로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든 것이란 지적이다.
오선희 법무법인 혜명 대표변호사는 “얘네가 학습이 됐다. 사회의 실패인데 ‘못 잡는다’는 확신이 주는 당당함이 있다”며 “개인들은 불안하긴 할 텐데 서로 격려하며 북돋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기자방을 만들어 모든 걸 조롱하면서 ‘절대 안잡힌다’는 허세를 부리는 건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 오히려 극한의 쫄림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며 “모니터 뒤에서 여성을 굴복시킨다는 비뚤어진 쾌감을 느껴오다가 이 상황이 중단되기를 원치 않는데, 경찰이 이렇게 비난받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이니 일부러 더 호언장담 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오 변호사는 “텔레그램 산업화로 돈 문제가 결부되면서 어린 친구들의 호기심을 이용해 끌어들이고 돈 벌려는 사람들이 있어 악순환 고리가 만들어졌다”며 “기성세대 중에는 실제 성폭행도 아니고 영상·사진 조작이 기분이야 나쁘지만 범죄인지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디지털 세대에게 이런 문화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금 10대는 현실 인간관계에 대한 개념이 기성세대와 많이 다르다”며 “좋아하는 이에게 고백하고 사귀는 것은 못해도 키보드로는 살아진다“고 말했다.
‘지인능욕’ 단어가 처음 등장했을 때 “올 것이 왔구나” 했다는 오 변호사는 “성적 호기심 표현보다는 ‘능욕’이 핵심”이라며 “감히 사귈 수 없는 예쁜 애를 집단 조롱하고 그를 지배할 수 있는 것처럼 쾌감을 느끼고, 평소 대적하지 못하는 교사나 엄마 같은 어른에 대해서도 사진을 몰래 가져와 조롱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민들의 분노와 무력감도 작지 않다. 분노는 가해자들을 향해 있기도 하지만 상당 부분은 사태를 방치한 국가에 있었다.
대학생 때 동기 남성들이 모인 단체 메신저 대화방에서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진 등을 올린 뒤 성희롱하고 싶다는 대화 등으로 디지털 성폭력 경험이 있다고 한 30대 직장인 정모씨는 “그런 피해자가 나뿐 아니라 학과 여학생 여럿이었지만 가해자들은 처벌받은 것이 전혀 없고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전공 수업을 같이 듣는 등 지옥같은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했다.
정씨는 10년 넘게 지난 피해 경험을 떠올리며 “지금 뉴스에 나오는 중·고등학생 딥페이크 범죄가 너무 걱정”이라고 했다. 당장 학교를 그만둘 수 없는 여학생들이 누가 범죄자인지도 모른 채 한 교실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너무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이번 사건도 지금만 반짝 하지 이대로 지나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크다”며 “국가가 소탕할 것이란 믿음이 전혀 없다”고 했다.
28일(현지시간) 프랑스에서 ‘온라인 성범죄 공모’ 혐의로 기소된 텔레그램 CEO 파벨 두로프. 연합뉴스 |
◆N번방 때랑 달라질 수 있을까…‘텔레그램 협조’ 받나
정부와 국민의힘은 이날 딥페이크의 온상이 되고 있는 텔레그램과 핫라인 구축에 나서고, 딥페이크 허위 영상물 범죄와 관련해 현재 징역 5년인 상한을 7년으로 강화하기로 했다. 텔레그램 측이 수사에 협조할 경우 지금까지와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최근 프랑스에서 체포된 텔레그램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파벨 두로프는 28일(현지시간) 온라인 성범죄 등을 공모한 혐의로 기소된 사실이 알려졌다.
프랑스 검찰은 이날 성명을 통해 “두로프가 미성년자 성 착취물을 조직적으로 유포하거나 마약을 밀매하는 범죄 등을 공모한 혐의, 범죄 조직의 불법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온라인 플랫폼의 관리를 공모한 혐의, 텔레그램 내 불법 행위와 관련한 프랑스 수사 당국과의 의사소통을 거부한 혐의 등으로 예비기소 처분을 받았다”고 밝혔다.
프랑스법상 예비기소란 수사판사가 범죄 혐의가 있다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지만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내리는 준(準) 기소행위에 해당한다.
오 변호사는 “텔레그램 N번방 때 주동자 중 하나인 조주빈을 때려잡는 것으로 끝났다”며 “그때와도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 사회는 이미 온라인 만남이 기본값이 되어 관계 맺기와 타인을 공격하는 방식이 다 바뀌었기 때문에 그에 맞는 법안 정비가 필수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허 조사관은 “경찰청, 당정, 정부 차원의 여러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며 “텔레그램과 협의해 계정 소유주를 잡아들이거나 미성년자 가해자는 5년간 SNS 계정을 못 만들게 하거나 본인 명의 휴대폰 소지를 금지하는 등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정지혜·이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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