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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해방 다음날 우리집서 만든 신문 ‘건국시보’… 광복의 기쁨 함께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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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61] 최정호 전 연세대 교수

망백(望百)의 나이에 접어든 최정호(91) 전 연세대 교수는 언론과 학계의 두 분야에서 활동한 국내 대표적 지식인으로 꼽힌다.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와 울산대 석좌교수, 한국신문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한국미래학회 회장과 한독포럼 의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의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의 흐름을 선도하며 국가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가 자신의 첫 번째 ‘보물’을 이야기하기 위해 떠올린 것은 열두 살 까까머리 소년 시절이었다.

해방 후 첫 ‘신문 배달 소년’

1945년 8월 15일, 잡음이 심한 라디오 방송 속 일왕의 목소리가 뭘 뜻하는지 국민학교 6학년생 최정호는 쉽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같이 듣고 있던 아버지 최한규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을 했다!” 그날 저녁, 전북 전주 노송동의 지역 유지였던 부친을 찾아온 사람들이 사랑방에 들어찼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앞으로의 일에 대처해야 하지 않겠소!”

다음 날인 16일 저녁 그곳에서 임시대책위원회가 열렸다. “우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제대로 알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신문을 발행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건국시보(建國時報)’라는 제호로 17일 자 신문을 만들어 톱기사 제목을 ‘조선 독립 당당(堂堂) 출족(出足)’이라고 했다. 전주 임시대책위원회가 조직됐음을 알린 기사 뒤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팟쇼와 나치를 타도한 민주주의의 승리는 약소민족 해방의 위대한 역사적 조건 하에… 삼천만 우리 조선동포도 해방을 보게 되엿다.’

자정이 가까워진 16일 밤 원고가 완성됐다. 마침 최정호 친구네 집이 인쇄소였는데 한글 활자를 몰래 숨겨두고 있었다. 17일 아침 6시, 최정호는 잉크 냄새가 싱싱한 신문을 받아다 거리로 나서서 배포하기 시작했다. “어! 이게 뭐야?” “정말이냐?” 신문을 받아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길에 멈춰 섰다. 갖고 온 신문은 금세 바닥이 났고, 그 일이 너무나 기뻐서 힘든 줄도 몰랐다. 그는 “동녘에서 떠오른 태양이 찬란한 여름 아침이었다”고 회고했다.

훗날 언론학자 최준 교수는 ‘한국신문사’에서 ‘8·15 해방 후 맨 먼저 창간된 신문은 전주의 건국시보였다’고 썼다. 최정호는 ‘해방 첫 신문의 배달 소년’이었던 것이다. 6·25 피란 때 없어진 그 신문을 나중에 쌀 두 가마 값을 주고 샀다. 그것이 최정호 교수의 ‘보물 1호’다.

조선일보

최정호(왼쪽) 교수가 전주사범학교 재학 시절 동창인 이규태(1933~2006)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과 함께 걸어가는 모습. 두 사람은 최 교수의 서독 유학 중에도 편지를 주고받았던 막역한 사이였다. /최정호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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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래학회와 한독포럼의 창립

1955년 기자 생활을 시작한 최정호는 1964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을 취재하던 중 주(駐)스위스 대사로 있던 이한빈(1926~2004·훗날 부총리)과 만나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작은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래를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968년 서독 베를린자유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최정호는 이한빈과 다시 만나 ‘한국2000년회’ 창립에 나섰다. 이것이 ‘한국미래학회’ 전신이었다.

학자, 언론인, 기업인, 법조인 등 29명이 분야와 학문의 벽을 허물고 ‘미래를 연구하자’는 데 뜻을 함께했다. 당시만 해도 ‘미래’라고 하면 정감록이나 무당들의 분야처럼 인식될 때였다. 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엘리트에게 가난하고 개발되지 못한 과거는 무(無)였고 오직 미래만이 전부처럼 보였다고 한다.

한국미래학회는 한국 사회의 미래 모습을 다양하게 전망했고,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명암(明暗)을 함께 조명했다. 창립 당시의 프로그램을 최 교수는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명예회원 박종홍을 비롯해 김경동, 김진현, 백낙청, 서기원, 소흥렬, 정범모, 정원식, 조순, 한배호, 함병춘 등의 창립 회원 명단이 거기에 적혀 있다.

2002년 월드컵 무렵 창립한 한독포럼 역시 최 교수가 창립을 주도했다. 독일 시사 주간지 ‘디 차이트’의 발행인이었던 테오 좀머와 함께 한국과 독일의 교류와 현안 논의를 위해 발족시켰다. 양국 정부에 정책을 건의하기도 했는데,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두 번이나 최 교수에게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

계간 ‘현대사’ ‘사상’ ‘진리·자유’

누가 보면 ‘잡지 창간호만 수집하는 사람’인 줄 알 만큼 최 교수는 계간지의 창간호를 여러 권 갖고 있다. “사실 다 제가 그 1호에 참여한 잡지들입니다.” 1980년 ‘서울의 봄’ 때 기획에서 나오게 된 ‘계간 현대사’는 젊은 세대의 현대사 인식을 위한 잡지였다. 북한은 ‘조선전사’의 반 이상이 현대사인 데 비해 우리는 1945년 이후의 역사를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그 결과 일부 학생들이 ‘6·25는 북침’이라 해서 깜짝 놀라 잡지를 만들게 됐다. 그해 10월 창간 축하연에 택시를 타고 가다 라디오 뉴스에서 신군부가 작성한 정기 간행물 폐간 목록을 발표하는데 ‘계간 현대사’가 나오는 걸 듣고 깜짝 놀랐다. 창간호만 발행된 비운의 잡지가 됐다.

1989년 여름 출간된 ‘계간 사상’은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발행인이었는데 창간호에 참여한 최 교수는 ‘소련이 곧 무너질 것’이라고 예측한 글을 실었다. 소련 해체 2년 전의 일이었다. 같은 해 연세대에서 나온 ‘계간 진리·자유’에도 글을 썼다. “우리가 ‘레토릭’을 ‘수사학’으로 잘못 번역했다고 지적하고, 제대로 된 말하기를 통해 중국말(한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썼습니다.”

최 교수가 지금 보는 한국의 모습은 어떨까. “우리나라는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그리고 산림녹화를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이루지 못했을뿐더러 이루려고 신경도 쓰지 않는 분야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법치화(法治化)입니다. 여전히 ‘법의 지배’가 아니라 ‘사람의 지배’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반드시 이뤄내야 미래가 있을 겁니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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