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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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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곳 낙방 성악가, 뉴욕ㆍ런던 오페라의 수퍼 루키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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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너 백석종 인터뷰

중앙일보

테너 백석종은 "계획대로 일이 잘 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신 차리라'는 태클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는 11일 서울 예술의전당의 국제음악제 폐막공연에서 노래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김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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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두 스토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우선 첫 번째. 전북 전주에서 인문계고 진학 시험을 실력보다 잘 못 본 학생이었다. 예정에 없던 실업계고를 고민하던 차에 성악을 전공하는 누나가 노래를 권했고, 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가지고 있는 소리가 좋았고, 노래 선생님은 바리톤으로 음역을 정해줬다.

대학 입시에서도 원하는 결과를 못 얻었다. 지망하던 두 대학을 떨어지고 한 대학에서 대기 번호 11번을 받았다. 합격생 11명이 취소한 자리를 물려받아 입학할 수 있었지만 결국 1년 만에 유학을 결심했다.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원을 꿈꾸면서 우선 캐나다 토론토에서 영어만 2년을 공부했다. 그 끝에 뉴욕으로 옮겨 시험을 봤는데 또 낙방이었다. 학교 두 곳을 떨어지고, 맨해튼 음대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제 일이 잘 풀리나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학비가 밀렸다. 등교할 때마다 경고음이 울렸다. 노래로 할 수 있는 일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고 군대까지 마쳐 졸업했더니 32세. 주위에서는 너무 늦었다고 했다.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오페라단의 장학 프로그램에 들어갔는데 ‘테너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확신이 됐다. 1년 만에 프로그램에서 나와 혼자 연습하기 시작했다. 2020년. 마침 코로나 19팬데믹이었다.

이제 두 번째 이야기. 2022년 영국 런던의 자존심인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에 본래 출연하려던 테너가 하차하면서 무대에 선 36세 대타 한국인이었다. ‘트럼펫 같은 소리’라는 호평을 받았다. 곧이어 같은 무대에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도 대타로 무대에 섰다.

런던의 객석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관계자가 있었다. 그 덕에 올해 2월 뉴욕의 한복판에서 ‘투란도트’ 칼라프 왕자로 6월까지 총 12번 노래했다. 뉴욕타임스는 “멋진 중저음과 파스텔 톤의 노래가 깊이를 더해 로맨틱한 통상적 주인공을 피해갔다”고 평했다. 또 “몸짓에는 절제된 우아함이 돋보인다”고 덧붙였다.



2년만에 인생역전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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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투란도트'에 출연하고 찬사를 받았던 백석종(가운데) 뉴욕=강태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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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백석종. 1986년생 성악가다. 너무 다른 두 이야기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우선 2020년으로 돌아가 보자. 백석종은 샌프란시스코의 한인 교회 예배당에서 매일 혼자 연습을 했다.

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백석종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테너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안되는 걸 되게 해야겠다고. 어떻게 하면 수월하게 높은음을 낼 수 있을지 매일 연습했다.” 팬데믹 기간이라 코치를 구할 수 없었다. 성악 하는 누나, 또 친구들과 영상 통화로 소리를 점검받아가며 연습을 거듭했다. “1년 가까이 전혀 안 됐다. 밤마다 악몽을 꿨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뭔가를 찾았다. 편하게 높은음을 부를 수 있었다. ‘이게 내가 내는 소리가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말하듯 소리가 나오면서 원하는 노래를 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었다. 소리를 찾자마자 로스앤젤레스의 로렌 자카리 콩쿠르에 나가 우승했고, 런던의 로열 오페라 대역으로 캐스팅될 수 있었다. “공연 8주 전 무대에 서라는 통보를 받았고 6주 연습했다. 단번에 주목을 받긴 했지만 연습을 엄청나게 많이 했다.”

그는 “머리가 빨리빨리 돌아가지는 않지만, 몸 쓰는 걸 좋아하고 운동을 잘해 노래도 연습 효과가 좋은 편”이라고 했다. 런던에서 함께 무대에 섰던 소프라노 엘리나가랑차는 “강철 심장을 가진 듯 데뷔에도 전혀 떨지 않는다”고 했다 한다. 백석종은 “연습으로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찾은 소리에 전 세계가 반응하고 있다. 지난달 런던 BBC 프롬스에 베르디 레퀴엠으로 데뷔했고, 9~10월에 뉴욕에서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역을 노래한다. 11~12월에 다시 런던에서 ‘토스카’, 내년 3~4월 ‘투란도트’ 무대에 서고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에 데뷔한 후 베를린에서 ‘아이다’에 출연한다. 2028년까지 스케줄이 꽉 찼다.



“늦었다 해도 신경 안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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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테너 백석종. 김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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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광의 시절이 오기까지 겪었던 숱한 실패에 대해 그는 “정신 차리라고 태클을 거는 것만 같았다”고 기억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다 잘됐다면 고민과 연습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지금 다시 시작하기는 늦었다는 말을 늘 들었는데 그때마다 개의치 않았다. 가야 하는 길을 간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지금도 말하듯 자연스러운 소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대학 시절부터 연습실에 들어가 영어 성경을 읽었다. 피아노는 딱 닫아놓고 석 장 정도를 40~50분 읽었다. 말하듯 읽다 보니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런 소리를 잘 아껴서 사용하는 것도 관건이다. “내 소리에 맞는 역할을 무리하지 않고 소화해야 한다.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소리를 다칠 수 있는 역할은 거절하고 있다.”

백석종은 성악을 시작할 때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2007)의 음성에 강하게 이끌렸다. “파바로티가 부른 ‘아무도 잠들지 마라(Nessundorma)’를 듣는 순간 ‘이게 내 길이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바리톤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부를 수 없었던 노래였고, 올해 2월 뉴욕에서 부르고 순식간에 뜨거운 주목을 받게 한 노래다. 그는 “이 노래의 ‘동 틀 무렵에 승리한다’는 가사처럼 동이 트듯 찬란한 노래를 하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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