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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전교생 160명의 기적… 고시엔구장 100주년 "동해 바다"로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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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국제고, 3년 전 4강 이어 우승 차지
결승전서 간토다이이치고 2-1로 제압
"일본 최고 됐다… 한일 모두가 승리"
한국일보

재일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 응원단이 23일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한신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제106회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여름 고시엔)에서 교토국제고가 우승을 차지하자 환호하고 있다. 니시노미야=류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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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선수)들에게 '너희들이 최고야'라고 소리치며 꽉 안아줄 거예요."

재일 한국계 교토국제고 야구부 소속이자 응원단장인 야마모토 신노스케(18)는 23일 이 학교의 '제106회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여름 고시엔) 우승이 확정되자 선수들과 동고동락한 날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쏟았다. '선수들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냐'고 묻자 "'너희 덕분에 일본 최고가 됐다'고 말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교토국제고는 이날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한신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일본 최고 고교야구대회 여름 고시엔 결승전에서 간토다이이치고를 2-1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1999년 4월 야구부 창단 이래 사상 첫 우승이자, 외국계 학교가 고시엔에서 우승한 것도 교토국제고가 처음이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의 기시 데쓰지 기자는 "일본에서는 교토국제고가 3년 전 고시엔 4강에 올랐을 때부터 크게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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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 선수들이 23일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한신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제106회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간토다이이치고를 2-1로 꺾고 우승한 뒤 응원석으로 달려가고 있다. 니시노미야=교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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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날 경기는 '라이벌전'을 연상하게 했다. 두 학교 모두 첫 우승 도전이고, 간사이 지역의 상징인 교토를 대표해 나온 교토국제고, 간토 지역의 얼굴인 도쿄도의 간토다이이치고 간 일본 동서 지역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응원 열기도 뜨거웠다. 교토국제고는 애초 초대석으로 1,200석을 확보했으나 "응원하러 가고 싶다"는 지역 주민들과 재일 동포, 졸업생들의 연락이 쇄도해 2,800석으로 늘렸다.

두 학교는 라이벌전답게 1회부터 9회까지 팽팽히 맞섰다. 경기가 투수전 양상으로 흐르면서 결국 양팀 모두 9회까지 단 한 점도 내지 못했다. 승부는 연장전에서 났다. 교토국제고는 10회초 무사 1, 2루에 주자를 두고 공격하는 승부치기에서 희생플라이 등으로 2점을 냈다. 이어진 10회말 구원투수 니시무라 잇키가 간토다이이치고에 1점만 내주고 틀어막아 우승을 확정했다. 2,800여 명의 교토국제고 응원단은 경기가 종료되는 순간 "고마워", "축하해"를 외치며 눈물바다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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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고시엔역 내에 한신고시엔구장 건설 100주년 광고가 걸려 있다. 니시노미야=류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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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올해로 건설 100주년이 된 일본 야구의 본향 한신고시엔구장에서 '동해 바다'로 시작하는 한국어 교가가 울려 퍼지는 진귀한 장면도 펼쳐졌다.

우승 확정 후 선수들이 운동장에서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大和·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한국의 학원"이라는 한국어 가사의 교가를 부르자 응원단도 일제히 응원 수건을 들어 올리며 따라 불렀다. 이 장면은 NHK를 통해 일본 전역에 생중계됐다. 한국인과 재일 동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남게 됐다.

재일 동포인 김안일(82) 교토국제고 야구부 후원회장은 "내가 백 살이 돼도 우승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말할 수 없이 기쁘다"며 "한일 우호를 위해 너무 잘된 일"이라고 강조했다.

교토국제고의 고시엔 우승은 기적 같은 일이다. 전교생이 160명인 작은 학교라 야구부를 넉넉히 지원할 수 없는 탓에 선수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실력을 쌓아야 했다. 장비 살 돈이 부족해 실밥이 터진 야구공에 테이프를 감고 연습할 정도였다. 백승환 교토국제고 교장은 "(운동장 크기가 작아) 장타를 연습할 때엔 다른 운동장을 빌려야 했다"며 "아이들이 악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한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온다"며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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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를 지원하기 위해 온 인근 학교 응원단이 23일 일본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한신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제106회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응원하고 있다. 니시노미야=류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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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원과 선수들 일부는 한국어 교가로 마음고생도 해야 했다. 고시엔 결승전이 열리기 전 일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일본인은 간토다이이치고를 응원한다'는 글이 상당수 올라온 탓에 '한일전'처럼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어 교가로 일본인들의 관심이 더 커지기도 했다. 경기장에서 만난 교토 출신의 20대 일본인 여성은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흥미롭다"고 말했고, 오사카에서 온 50대 남성도 "소수의 일본인만 문제라고 생각할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날 경기장을 찾은 박철희 주일 한국대사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새 역사를 쓴 느낌"이라며 "교토국제고는 한일 협력의 상징으로, 양국 모두 이긴 멋진 시합이었다"고 말했다.

교토국제고는 이번 우승으로 명실상부 '일본 야구 명문'으로 거듭나게 됐다. 교토국제고는 1947년 재일동포 단체가 민족 교육을 위해 세운 교토조선중으로 출발했다. 1958년 학교법인 교토한국학원으로 재편해 한국 정부 인가를 받았고, 1963년 고등학교를 개교했다. 이어 2003년에는 교토국제중·고로 교명을 바꿔 일본 정부에서도 정식 학교 인가를 받았다.

현재 재학생 65%는 일본인이고, 야구단 선수들도 재일동포 3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본인이지만 민단 소속에 한국 정부의 지원도 받는 한국계 학교다.


니시노미야= 류호 특파원 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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