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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경제학 뿌리는 고대 그리스 ‘오이코노미아’에 있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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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가정경영론’을 쓴 고대 그리스 작가 크세노폰.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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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가정경제학
김재홍 역주 l 그린비 l 1만7000원



한겨레

경제학 (economics) 은 근대에 태어난 학문으로 여겨진다 . 스코틀랜드 도덕철학자 애덤 스미스가 근대경제학의 아버지로 거명되고 , 스미스의 저서 ‘ 국부론 ’(1776) 이 근대경제학의 출범을 알린 저작으로 꼽힌다 . 그러나 경제학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 국부론 ’ 탄생보다 2000 년 앞선 고대 그리스에까지 이른다 . 그 고대 그리스 시대 경제학의 모습을 알려주는 저작 가운데 하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으로 내려온 ‘ 오이코노미케 ’(oikonomike) 다 . 이 책이 김재홍 정암학당 연구원의 역주를 거쳐 ‘ 아리스토텔레스 가정경제학 ’ 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



이 책에서 ‘가정경제학’이라고 옮겨진 ‘오이코노미케’는 ‘오이코스’(oikos)와 ‘노모스’(nomos)의 합성어다. ‘집’을 뜻하는 ‘오이코스’는 단순히 건물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정과 그 가정에 딸린 재산, 곧 토지와 농지와 노예를 포괄한다. 또 ‘노모스’는 그 동사형(네메인, nemein)이 가리키는 대로 ‘분배‧할당‧관리‧감독‧경영’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따라서 두 단어가 합쳐진 ‘오이코노미아’(oikonomia)는 가정관리 또는 가정경영을 의미한다. 이 말에 ‘기술’을 뜻하는 어미가 붙어 ‘오이코노미케’(oikonomike)가 나왔다. 오이코노미케는 가정관리술 또는 가정경영술을 가리킨다. 경제학의 맨 처음 모습은 ‘가정경제학’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을 빌려 통용돼온 일종의 위서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이 책을 쓴 것일까? 문헌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사후(기원전 322년) 50년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학파 사람들이 이 텍스트의 원본을 썼으며, 이 원본에 후대의 가필이 더해져 지금의 모습이 된 것으로 본다. 눈여겨볼 것은 이 텍스트의 배후에 두 종의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중 하나가 플라톤의 동시대인 크세노폰이 쓴 ‘가정경영론’(오이코노미코스)이고, 다른 하나가 ‘가정경영’(오이코노미아)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제1권이다. 이 두 사람의 주요 논의가 이 책의 이론적 바탕을 이룬다.



플라톤과 유사하게 대화체 저술을 남긴 크세노폰은 ‘가정경영론’에서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가정경영’에 관한 크세노폰 자신의 생각을 상술한다. 재산을 늘리려면 가장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아내는 집안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 그리고 남편과 아내는 어떻게 합심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이야기한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은 ‘정치학’이라는 큰 범주의 하위 범주로서 ‘오이코노미아’를 좀 더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기술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폴리스(정치공동체)는 오이코스(가정공동체)로 구성돼 있다’고 말한다. 오이코스가 합쳐져 폴리스가 됐다는 얘기다. 따라서 폴리스를 거론하려면 먼저 오이코스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또 폴리스의 통치를 이해하려면 오이코스의 통치 곧 오이코노미아를 알아야 한다. 오이코노미아가 ‘정치학’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크세노폰-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와 함께 살펴볼 것이 오이코노미아 의미의 확장이다. 오이코노미아의 본디 뜻은 ‘가정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일’이지만, 이미 고대에 그 말의 외연은 크게 넓혀져 있었다. 그리하여 오이코노미아는 폴리스의 경제적 관리, 더 나아가 폴리스와 폴리스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심지어 기원전 3세기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오이코노미아를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가리키는 데 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기원후 1세기 역사학자 스트라본은 이집트를 이야기하던 중에 ‘좋은 오이코노미아는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오늘날과 거의 같은 의미로 썼다.



이 책은 이렇게 오이코노미아의 의미망이 넓어져 가는 길의 어떤 지점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먼저 이 책의 첫 부분(제1권)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한 방식으로 국가의 관리와 가정의 관리가 어떻게 다른지 살핀 뒤 가정관리를 이론적으로 간략히 설명한다. 이어 제2권에서는 재정을 ‘왕과 총독과 국가와 개인’의 네 경우로 나누어 각각의 수입원을 이야기한 뒤, ‘군주들이 재산을 획득한 다양한 방책’을 78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오이코노미아가 ‘가정관리’를 넘어 ‘국가관리’ 차원으로 확장돼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라고 할 만하다. 특히 이 제2권에서 국가 재정을 설명하는 중에 오늘날의 ‘국민경제’(political economy)에 해당하는 ‘폴리티케 오이코노미아’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책의 마지막을 이루는 제3권은 제2권의 논의에서 방향을 확 바꿔 결혼 생활에서 남편과 아내의 의무를 살핀다. 이 제3권은 그리스어 원본은 사라지고 라틴어 번역본만 남아 있는데다 텍스트의 성격도 제1권이나 제2권과 다르게 윤리학적 성격이 강해, 근래의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 사이에서 경시돼왔다. 그러나 이 글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거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해도, 크세노폰이 ‘가정경영론’에서 이미 집안을 이끌어가는 두 주체로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소상히 다룬 바 있기 때문에 오이코노미아와 무관한 논의라고 볼 수는 없다.



더구나 이 제3권의 내용은 후대에 끼친 영향만 보면 제1권이나 제2권보다 오히려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관련해 ‘조심스러운 배려’를 권장하는 대목이다. 이 텍스트는 “남편과 아내가 한마음으로 집을 꾸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며 “옳은 일을 하기 위해 관대하게 서로 섬기라”고 조언한다. 아내에게는 이런 말도 한다. “확실히 행운을 잘 이용하는 것은 하찮은 일도 시시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역경을 잘 견디는 것은 틀림없이 더 존경스럽다.” 위대한 정신만이 큰 불의와 고통 속에서도 바른 행실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권고다.



이런 권고에 담긴 윤리관은 남편을 주인으로, 아내를 보조자로 보는 크세노폰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보다 부부 평등의 관념에 좀 더 다가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 제3권의 ‘부부의 결합과 일치’에 관한 논의는 11세기에 아랍어 번역판이 나온 뒤 이슬람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중세 이후 유럽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고대에 경제학과 윤리학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이 텍스트에서 엿볼 수 있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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