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정릉골 주민이 지난달 31일 마을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서울 성북구 북한산 자락
청계천 철거민 이주로 형성
가난한 사람들 결국 내몰려
“나이 들어 떠나기 쉽지 않고
갈 집 없는데 살길이 막막”
서울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143번 시내버스를 타고 성북구 정릉 종점에 내려 정릉천을 건너면 ‘정릉골’이란 마을이 나온다. 북한산 자락에 낡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 마을은 1960~1970년대 청계천 일대 무허가주택 철거로 살 곳을 잃은 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만들어진 달동네다.
지난달 31일 정릉골은 얼핏 빈집들만 남은 동네로 보였다. 마당에 깨진 유리창이나 쓰레기가 쌓인 채 방치된 집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미로 같은 좁은 골목을 따라 이리저리 다녀보니 사람 사는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 담벼락 앞 뿌려진 연탄재, 그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분홍색 벽화….
한민경씨(59)는 정릉골에 살면서 마을 가꾸기에 앞장서온 주민이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한씨는 “그제까지만 해도 안 보였던 짐인데 누가 그새 또 이사를 나갔나 보다”라면서 “이주계획이 시작된다고 하니 나가는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생겨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도 곧 이사를 가야 할까 걱정이라고 했다.
정릉골은 재개발을 거쳐 고급 타운하우스로 조성될 예정이다. 정릉골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에 따르면 20만3965㎡ 면적에 지상 4층·지하 2층 규모 타운하우스가 1417가구 건립된다. 이를 위해 조합은 이달부터 내년 1월까지를 이주기간으로 설정했다. 지분이 있는 조합원이라면 타운하우스 완공 뒤 돌아올 수 있겠지만, 한씨 같은 세입자들은 새로 살 곳을 찾아 떠나야 한다. 정릉골에는 세입자가 405가구 정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한씨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다. 한씨가 정릉골 중턱에 있는 초록색 대문 집의 5평 남짓한 단칸방을 얻어 남편과 둘이 살기 시작한 건 17년 전이다. 인근 대학교 청소노동자로 일하는 그는 직장도, 지인도 전부 정릉골 주변에 있다. 새벽 일찍 일을 나가야 하기에 정릉골에서 너무 멀어지면 직장까지 잃게 될까 걱정이 크다. 한씨는 “옷은 없으면 사 입으면 그만인데 집이 없으면 그냥 갈 데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며 “나이 먹고 떠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하도 심란하니 괜히 매일같이 짐 정리만 하게 된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재개발 얘기가 나돈 건 30년도 넘다보니 이번에도 그냥 지나가겠거니 했다고 한다. 마을 초입에서 만난 70대 A씨는 곳곳에 붙은 재개발 안내문을 보며 “저런 스티커가 붙은 지 오래됐다. 재개발 된다, 안 된다 말만 많아서 그런가보다 한다”고 말했다.
마을이 워낙 낙후된 상태다 보니 주민들도 재개발 필요성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노후화돼서 물이 안 나오기도 하니까 재개발이 되긴 돼야죠. 근데 원래 살던 사람들은 다 쫓겨 나가서 이 동네가 아예 사라지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한씨가 말했다.
한씨네 맞은편 마당 넓은 집에 사는 김영리씨(55)는 정릉골 토박이들에 비하면 젊은층에 속한다. 김씨는 ‘달동네’ ‘빈집 슬럼’ 같은 표현은 정릉골의 삶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했다. 김씨는 “낡은 자취방 같은 집에 살아도 그 좁은 공간을 쓸고 닦고 하면서 공동체를 가꾸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며 “투기 목적으로 집을 사놓은 사람들이 방치한 폐가만 보고 정릉골을 싹 다 쓸어내야 한다는 얘기들을 하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정릉골엔 잎이 무성한 라일락 나무가 유독 많다. 내년 이맘때에도 나무들이 그 자리서 자라고 있을진 알 수 없다. 한씨는 담벼락에 기대 하늘 높이 자란 나무를 가리키며 “서울 어디에도 이렇게 굵은 라일락 나무가 없을 텐데, 재개발로 라일락도 다 사라지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송이 기자 songyi@kyunghyang.com
▶ 매일 라이브 경향티비, 재밌고 효과빠른 시사 소화제!
▶ ’5·18 성폭력 아카이브’ 16명의 증언을 모두 확인하세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