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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 (수)

[단독] "악명 높은 고문수사관 고병천, 국가에 구상금 1억8800만원 물어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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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낸 구상금 청구 소송 일부 인용
"고병천, 지휘권 행사할 수 있는 지위"
1년 전과 상반된 판결… 항소심 주목
한국일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정다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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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전직 국군보안사령부 수사관 고병천(84)이 국가에 구상금을 물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고씨의 고문으로 인해 간첩으로 몰렸다가 재심 끝에 무죄를 인정받은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받은 배상금 일부를 고문의 직접적 가해자인 고씨가 지불하란 취지다. 앞서 고씨가 수사했던 또 다른 간첩조작 사건의 구상금 소송에선 국가가 패소했는데 이번에 상반된 판결이 나온 것이다.

1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8부(부장 김도균)는 국가가 고씨를 상대로 제기한 구상금 청구 소송에서 5월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국가가 청구한 3억7,700여 만 원 중 약 1억8,800만 원이 인용됐다. 재판부는 "피고(고씨)가 주장하는 사정만으로는 원고가 피고에게 구상권을 행사하는 것이 남용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고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지도 않는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고씨에게 구상금을 청구한 건 '재일교포 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 윤정헌씨 사건 때문이다. 1984년 유학생 신분으로 고려대 의대에 다니던 윤씨는 별안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보안사에 연행돼 징역 7년,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25년이 지나고서야 고문에 의한 조작 사건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2011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12억3,000여 만 원을 받았다.

정부는 이 배상금 일부를 고씨가 부담해야 한다며 소송을 걸었다. 고문 행위에 대한 공소시효가 지난 현시점에선 국가의 구상권 행사가 간첩조작 사건 주동자들을 단죄할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고씨에게 사건 조작을 주도할 만한 영향력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계장을 제외하면 반장인 피고가 가장 높은 상급자였으므로 수사관들에게 어느 정도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라며 "재일교포 간첩검거를 주도한 공적을 인정받아 포상을 받기도 했으므로 단순히 상부의 지시에 따라 수동적으로 가혹행위에 가담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짚었다. 당시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 수사2계 소속이었던 고씨가 윤씨 간첩조작 사건에 적극 가담했다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보고서, 고씨가 윤씨 재심 재판에서 "윤씨 간첩사건을 비롯해 1982년 또 다른 간첩사건에서도 가혹행위를 한 일이 없다"고 위증했다가 징역 1년형을 선고받은 사실 등이 판단의 주요 근거가 됐다.

반면, 약 1년 전 윤씨 사건과 대동소이한 다른 간첩조작 사건의 구상금 청구 소송에서는 이번과 다른 판결이 나왔다. 지난해 8월, 1983년 '서성수 간첩 조작 사건' 관련 구상금 소송에서 같은 법원 민사904단독 재판부는 국가 패소 판결했다. "고씨가 당시 계장 다음으로 높은 직급에 있었다"는 정부 측 주장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가 없고,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계장 다음으로 높은 직급자에게 수사관들에 대한 지휘∙감독권이 있다고 보기 어렵단 이유였다. 정부가 항소해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정부는 고씨의 위증이 구상권 청구 소송 일부 승소 판결의 주요 근거가 됐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고씨가 적어도 1982년부터는 계장 다음으로 계급이 높은 자로서 가혹행위를 주도했다는 사실이 사실상 인정된 거나 다름없어서다. 대검찰청은 15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고씨의 지위, 근무 부서 특성, '서성수 사건' 전후의 유사 사건을 종합하면 그가 불법행위를 적극적으로 주도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항소 이유를 밝혔다. 윤씨의 재심 사건을 맡았던 장경욱 변호사는 "고문수사관의 악행에 대해 반드시 국가가 민사상 책임을 묻고 피해자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는 판결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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