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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 (화)

윤봉길, 중국을 움직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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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魯迅)공원.

중국이 자랑하는 대문호 루쉰의 묘가 있는 곳이다. 또한 루쉰 기념관도 있다. 학창시절에 읽었던 『아Q정전』, 『광인일기』가 다시 읽고 싶은 곳이다. 루쉰공원은 1988년부터 붙여진 이름이고 그 이전에는 훙커우(虹口) 공원으로 불렸다. 이곳에 24살 대한민국 청년의 기념관이 있다.

윤봉길 기념관.

루쉰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안내 표지판이 있다. 4개 표지판 제일 위에 ‘梅园 윤봉길 기념관 250m’라는 글귀가 보인다. 중국이 친절하게 한자 옆에 한글로 표시했다. 밑에 있는 3개 표지판은 游乐场, 鲁迅墓, 游船码头 등으로 한자로만 표시돼 있다. 표지판을 따라가면 한글로 적힌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관’을 만날 수 있다. 입장료는 1인당 15위안(한화 2800원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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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공원 입구에 있는 표지판. 제일 위 표지판에 한글로 '윤봉길 기념관'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고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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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한국 사람을 추모하는 전시관이 있다니. 의외였다. 가이드 덩양즈(鄧陽芷)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항일이잖아요. 항일에 중국‧한국이 따로 있나요”라고 대답했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보다 그냥 그대로 받아들였다.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니 표지석 2개가 보인다. 하나는 ‘윤봉길 의거 현장 1932.4.29.’로 적혀 있고, 다른 하나는 ‘윤봉길 의사 업적 소개’라고 작은 글씨로 바위에 새겨져 있다.

여기서 잠깐. 의거 현장에 서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어! 생각했던 것보다 작네. 1932년 4월 29일은 일본 천황의 생일을 기념하고 1차 상하이 사변(중국과 일본의 무력충돌 사건) 승리를 자축하는 날이었다. 그래서 상하이에 사는 일본인 1만 명과 상하이 침략 일본군 1만 명 등 2만여 명이 운집했다. 그런데 2만 명이 모이기에는 의거 현장이 너무 협소해 보이는 것이다.

그 이유를 가이드 덩에게 물어보니 “의거 현장이 실제와 다르다는 의견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그는 “정확한 의거 현장에 대한 고증 작업을 거쳐 표지석을 새로 설치한다는 얘기가 10년 전에 있었는데, 아직 그대로 있네요”라고 덧붙였다. 고증 작업이 서둘러 진행되기를 바라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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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기념관 입구의 표지판에 한자와 함께 한글로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관'이라고 적혀 있다. 사진 고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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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석을 지나면 2층 건물의 윤봉길 기념관이 보인다. 2003년에 세워졌다. 2층 정중앙에 매헌(梅軒)이라고 적힌 편액(건물의 이름을 써서 문 위에 거는 것)이 보인다. 매헌은 윤봉길 의사의 호이다. 1층은 출생부터 농민부흥운동, 훙커우 공원 의거 때까지의 사적을 보여주는 유품과 사진이 전시돼 있다. 2층은 의거 이후의 사적, 의거의 역사적 의의 등에 관한 자료가 있다.

윤봉길 의거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당시 중국의 최고 통치자였던 장제스 군사위원장은 “중국의 1백만 대군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극찬했다. 죽거나 다친 일본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장제스가 극찬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으로 단상 위에 있던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는 12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한 달 뒤에 사망했다. 함께 있었던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은 한쪽 눈을 실명했다.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은 왼쪽 다리를 절단했다. 특히 오른쪽 다리가 잘린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1945년 9월 2일 외무대신 자격으로 미국 군함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윤봉길 의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무관심했던 장제스는 폐쇄 위기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영비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생활비 등을 전폭 지원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1933년 5월 난징에서 김구를 만나 뤄양 군관학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해 주는 등 항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에 따라 한국 청년들이 정식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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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기념관에 있는 '윤봉길 의거 현장' 과 '윤봉길 의사 업적 소개'가 적힌 표지석. 사진 고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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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중 관계는 1931년 만보산 사건 등으로 악화해 있었다. 만보산 사건은 중국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 지역에서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벌인 유혈사태를 말한다. 윤봉길 의거로 불편했던 한중 관계가 회복되고 한중연합 투쟁의 활로가 열렸다.

대표적인 일이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가 예상되자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 중국 주석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일본이 패전할 때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장제스는 한국의 독립을 강력하게 제안했다. 그의 제안에 따라 카이로 선언문에 “적당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에 있는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장제스가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에 감명을 받아 제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이로 회담은 알다시피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최초의 연합국 회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런 장제스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건국훈장은 그 공로에 따라 5개 등급으로 구분되는데 대한민국장‧대통령장‧독립장‧애국장‧애족장 등이다. 이 가운데 최고위장인 대한민국장이 가장 명예로운 훈장이다. 김구‧안창호‧안중근‧윤봉길‧김좌진 등이 이 훈장에 추서됐다. 외국인은 29명이 추서됐는데 그 가운데 5명이 중국인이다. 쑨원‧장제스‧쑹메이링‧천치메이‧천궈푸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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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기념관에 있는 윤 의사 흉상. 흉상 왼쪽에 새겨진 글귀는 '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 윤 의사가 만주로 떠나면서 남긴 유명한 말이다. 사진 고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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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는 일본 헌병대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과 일본이 1932년 5월 5일 정전협정을 맺으면서 일본군은 귀국하게 됐다. 그해 11월 일본 헌병대가 귀국하면서 윤봉길 의사도 일본 고베항에 갔다. 그리고 오사카 형무소로 이송돼 수감된 이후 가나자와의 제9사단 유치장으로 옮겨졌다. 제9사단장은 바로 훙커우 공원에서 중상을 당한 우에다 중장이었다.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는 가나자와 육군 공병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유해는 해방 이후 1946년 귀국해 국민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위치한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삼의사는 윤봉길‧이봉창‧백정기를 말한다.

끝으로 윤봉길 의사는 의거를 앞두고 이틀 전인 4월 27일 훙커우 공원을 다녀온 뒤 유촉시 4편을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상하이 윤봉길 기념관에 남겨져 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아들)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에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고수석 국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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