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돌아가시거나 사업 실패하는 아버지…어머니 생활력 강해져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어머니 꼽는 [삶] 인터뷰이들 적지 않아
김민정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와 출산 직후의 아들 |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아버지가 스님이 되겠다고 출가하셨다", "아버지가 병으로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고생했다", "아버지가 하는 사업마다 번번이 실패해서 엄마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연합뉴스의 [삶] 인터뷰이(Interviewee) 중에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거나 경제적으로 무능한 사례들이 많았다.
이런 환경은 어머니를 생활력이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인터뷰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이런 어머니의 삶을 보면서 강인한 사람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삶] 인터뷰이들은 대체로 어려운 여건에서도 다른 사람을 돕거나, 종사하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은데, 강인한 정신력과 일관된 성실성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인터뷰이들 상당수는 존경하는 사람으로 어머니를 꼽았는데,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아래 내용들은 연합뉴스가 2022년 10월부터 송고한 [삶] 인터뷰 내용 가운데 부모님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현정화 마사회 탁구 감독 |
◇ 마사회 탁구 감독 현정화(한국 탁구계의 정신적 지주로서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 어릴 때 가정 형편은 어떠했나.
▲ 매우 어려웠다. 초등학교 시절에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칠판에 이름이 적히곤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탁구를 시작하면서 트레이닝복을 사야 했는데, 돈이 없어서 곤란했던 것도 생각이 난다. 아버지가 폐결핵을 앓다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가정주부였던 어머니는 갑자기 식당 조리사로 일하게 됐는데, 늘 일찍 일어나시고 늦게 주무셔야 했다.
--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 어머니다. 늘 곧았고 부지런하셨다. 나는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자녀들을 키우면서 아플 때도 있었지만 누워서 편하게 지내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내가 누구보다도 성실한 선수 중의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다.
-- 본인의 좌우명이나 삶의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 항상 노력하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왔다. 나 스스로 약간의 나태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대회에서 1등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2등은 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됐다. 1등이 아니면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 게임이라도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살이 안 찌는 것도 이런 성격의 영향이 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진중권 교수 |
◇ 진중권 광운대 교수(강의와 방송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치적, 사회적 견해를 열심히 전하고 있다.)
-- 어릴 때 집안 사정은 어떠했나.
▲ 가난했다. 극도로 궁핍한 것은 아니었다. 중류층보다 약간 아래 수준이었다.
--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
▲ 아버지는 개척교회 목사여서 오랫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 급여를 받기 시작했을 때도 보통 사람 월급의 3분의 1 정도에 머물렀다. 아버지는 봉급을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돌아가셨다. 연탄가스 중독 후유증 때문이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셨나.
▲ 어머니가 피아노 교습을 하셨다. 사범학교에서 풍금을 배웠기에 가능했다. 어머니는 사범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는 바람에 교직에 몸담지는 않았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민정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 |
◇ 김민정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홀로 아이를 키운 미혼모로서 다른 미혼모들의 삶에 희망을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고향은 어디인가.
▲ 경남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에서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했다. 먼저 아버지가 출가해 스님이 됐고, 이에 화가 난 외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데려갔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 할머니가 혼자 손주 두 명을 키우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 초등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큰 아버지는 할머니 혼자 아이들을 키울 수 없으니 우리 자매를 보육원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스님인 아버지가 그 옆에 앉아 있었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울기만 했다. 그때 할머니는 본인이 직접 키우겠다고 했다. 아버지 형제들은 반대했지만, 할머니는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 성장 과정에서 생활 형편이 어려웠나.
▲ 집에 쌀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반찬은 김치, 간장, 고추장뿐이었다. 쌀밥 대신에 보리밥과 수제비, 칼국수를 먹는 날이 많았다. 할머니는 칼국수에 라면 하나를 넣어 끓여주시곤 했는데, 라면 맛이 나지는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전과(참고서)나 문제지 등을 사본 적이 없다. 매달 학교로 배달되는 '이달의 학습지'를 구독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으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학원도 가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 나는 보육원에 갔더라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 도시락을 싸 가는 것은 문제가 없었나.
▲ 내 키가 153㎝밖에 안 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점심때 굶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매일 도시락 반찬으로 김치만 싸주시니 아이들과 같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가 만든 계란말이, 감자조림 등을 싸 와서는 여럿이 둘러앉아 같이 먹곤 했다. 나는 김치 반찬이 싫어서 아예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는 교실 밖의 계단에 앉아 있곤 했다. 언니는 나와 달랐다. 매일 도시락 반찬으로 김치를 갖고 학교에 가서 꿋꿋하게 다 먹었다. 언니의 키가 나보다 5㎝ 더 큰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 내가 도시락을 싸간 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논이나 냇가에서 메뚜기를 잡아 팔면 돈을 조금 받았는데, 이걸로 소시지를 사서 반찬으로 만들어 학교에 가져간 날이 있었다.
-- 집안일도 많이 했나.
▲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빨래를 했다. 더운물이 없으니 한겨울 빨래터는 냇가가 아닌 우물가였다. 우물물이 냇물보다는 덜 차갑기 때문이다. 그때는 고무장갑도 없었다. 초등학교 5∼6학년 때부터는 남의 집 모내기, 벼 베기에 가서 일을 도와주고는 품삯을 조금 받았다. 겨울에는 산으로 나무하러 갔다. 떨어진 솔잎을 모아서 포대에 담아 집으로 가져오는 일이었다. 가을에는 밤나무밭에 가서 할머니의 밤 수확을 도왔다. 가시 장갑 없이 맨손으로 밤을 수확하려니 가시에 많이 찔렸다. 마을 사람들은 부모 없이 홀할머니와 사는 우리 자매를 보면 "불쌍하다. 잘 커야 한다"고 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이계호 교수 |
◇ 이계호 태초먹거리학교 교장(대학생 딸을 유방암으로 잃은 후에 건강한 먹거리와 건강관리 방법에 대해 무료 강의를 하고 있다. 충남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 어디서 태어났나.
▲ 3남 1녀 중 장남으로 대구에서 태어났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
▲ 아버지는 미곡상을 하시다 광산에 투자하는 바람에 파산했다. 빚쟁이에 쫓겨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이주하신 뒤 송파구 가락동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셨다.
-- 아버지가 투기적 성향이 있었나.
▲ 그런 분은 아니었다. 당시는 강원도 광산에서 임금을 쌀로 주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광산에 쌀을 공급했으나 탄이 나오지 않아 돈을 받지 못했다. 빚쟁이가 매일 찾아왔기에 대구에서 살 수 없었다.
-- 부모님은 서울로 가신 뒤 가정 경제에 도움을 못 줬나.
▲ 맨손으로 올라가셨으니 본인들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처음에는 날품팔이 일꾼 노릇도 하면서 매우 어렵게 생활하신 것 같다. 부모님은 서울에 계시다 부산으로 내려가 과일 장사를 하셨다.
-- 본인은 학업을 중단해야 했나.
▲ 나는 고교 3학년 1학기를 중퇴하고 세차장에서 일했다. 3명의 동생과 할아버지가 집에 있었는데, 일단 먹고 살아야 했다. 세차장은 친척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거기서 차에 기름치는 일도 했다. 이런 생활을 2년 정도 했다.
-- 생활이 아주 어려웠나.
▲ 매일 봉지 쌀을 사 먹어야 했다. 굶는 날도 많았는데, 그런 날은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 그 시절 나는 세상을 저주했다. 나와 비슷한 실력의 친구들은 유명 대학에 진학했지만, 나는 세차장에서 일하고 있었으니 참으로 힘들었다.
-- 2년 후에는 무슨 일을 했나.
▲ 과외를 했다. 처음에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산수를 가르쳤고, 중학생과 고등학생으로 대상을 옮겨갔다. 자취방에 탁자를 놓고 8∼10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나는 유능한 교사로 소문이 났다. 과외 1시간을 위해 1주일 전부터 영어 본문, 수학 문제를 통째로 외울 정도로 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이다. 책을 안 보고 본문을 칠판에 그대로 쓰니 아이들과 어머니들 사이에서 평가가 좋았다. 수입도 괜찮았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미영 1형 당뇨 환우회 대표 인터뷰 사진 |
◇ 김미영 1형 당뇨 환우회 대표(1형 당뇨 아이의 엄마다, 1형 당뇨환자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연속혈당측정기를 국내에 도입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의 삶을 다룬 영화가 조만간 공개될 예정이다. 영화배우 최지우가 주연을 맡았다.)
-- 어디에서 태어났나.
▲ 서울에서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전라남도 광양군 광양읍으로 이사 간 뒤 그곳에서 자랐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 아버지는 월남전 참전용사다. 그 트라우마가 있었는지 정신적으로 불안했다. 술을 마시면 가정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정집에 석유류를 공급하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셨다. 나는 초등학교 2∼3학년 때부터 주문 전화를 받는 등 가게 일을 도왔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다리에 암이 생겼는데, 그게 악화돼 돌아가셨다.
-- 아버지가 정신적으로 불안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 나는 초등학생 때에도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놀지 못했다.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셨기 때문이다. 책꽂이에 있는 책의 방향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으셨다. 설거지한 그릇이 정돈돼 있지 않는 것도 참지 못하셨다. 술을 인사불성으로 마시는 날도 많았는데, 그런 날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제대로 잠을 못 잤다. 아버지의 훈계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이런 아버지에 맞춰 살아야 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화해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생활 형편이 어려워졌나.
▲ 어머니가 가게 일을 접고, 읍내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셨다. 집안 형편이 어렵다 보니 나는 고등학교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교를 선택해야 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성은 갤럽 선교회 목사 |
◇ 탈북민을 돕는 김성은 갈렙선교회 목사(다큐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에 김 목사가 동남아의 밀림을 헤쳐가면서 탈북민을 인도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그가 하는 일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만 위험하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 고향은 어디인가.
▲ 7남매 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내가 20세 때 세어보니 35차례나 이사한 것으로 나왔다. 아버지가 사업하느라 가족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다 보니 그렇게 됐다. 오전에 월셋집에 들어갔다가 가족이 많다는 것이 들통나서 오후에 쫓겨난 일도 있었다.
-- 아버지가 무슨 사업을 하셨나.
▲ 아버지는 해병대 부사관 출신이다. 5·16쿠데타를 일으킨 당시 박정희 장군과 함께 한강을 건넜다고 한다. 아버지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제대했다. 윗사람한테 대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제대 후 외국산 괘종시계와 석유 곤로(풍로)의 한국 판매 대리점을 운영하셨다. 그 사업이 잘됐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돈 많은 사람들에게 있었던 '여자 문제'가 아버지에게도 생겼다. 아버지 밑에서 일했던 친척 아저씨의 배신도 있었다. 아버지는 부도를 맞았고, 우리 가족은 야반도주하듯이 야간열차를 타고 군산으로 내려왔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우리 가족은 군산 변두리의 아주 작은 무허가 초가집에서 살았다.
-- 아버지는 군산에서 무슨 일을 하셨나.
▲ 아버지는 일을 포기하셨다. 그때 아버지는 40대였는데, 모든 의욕을 잃으셨다. 물론, 아버지가 아예 일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와 내가 책임져야 했다.
-- 본인은 학창 시절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나.
▲ 나는 고깃배가 항구에 들어오면 바닷고기를 부두에 내려주는 일을 했다. 돈을 받지 않고 일을 도와줬다. 그러면 바닥에 떨어지는 바닷고기를 주워가도 주인이 눈감아줬다. 그 고기를 시장에서 팔면 돈이 됐다. 중학교 방학 때는 고깃배를 탔다. 대만 앞바다까지 가는 배였다. 당시 일반인이 직장에 들어가면 한 달 급여가 3만∼4만원이었는데, 고깃배를 타면 보름 정도 일하고 15만∼30만원을 받았다. 상당히 좋은 수입이었다.
-- 고깃배에서는 무슨 일을 했나.
▲ 선원들을 위해 밥 짓는 일을 했다. 그런데 깊은 바다에 나간 고깃배에서는 산에서 그러하듯이 밥이 제대로 안 됐다. 맨 위는 설익고, 중간은 죽 상태, 맨 아래는 까맣게 타는 삼층밥이 됐다. 선원들이 밥도 제대로 못 하느냐면서 나를 때리곤 했다. 바다에서는 고기가 들어있는 그물에 상어들이 몰려들곤 하는데, 선원들은 내 몸을 들어 올려 바다에 던져버리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키가 작은데, 중학교 때는 더 왜소했다. 선원들의 그런 위협은 장난이기도 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엄청나게 무서운 일이었다. 냄비 뚜껑을 무거운 것으로 눌러주면 삼층밥이 안 되는데, 선원들은 그런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 학교는 제대로 다녔나.
▲ 학업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계속 배를 타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중고 시절 이후에는 폴리텍대학교(당시 기술전문학교)로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대기업그룹 방산업체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10년 정도 일하면서 자격증을 27개나 땄다. 당시에 나는 실력을 꽤 인정받았고, 수입도 좋았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국제구호 전문가 한비야 |
◇ 국제구호 전문가 한비야(오지 여행을 하다 국제구호에 참여했다. 전 세계 여러 재난 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구조활동을 했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 아버지는 조선일보, 한국일보 정치부 기자를 지냈다. 아버지를 태워 가기 위한 회사 지프차가 집 앞으로 오곤 했다. 고향이 북한이었던 아버지는 홀로 고생했던 기억 때문인지, 길거리에서 거지 아이를 보면 집에 데려와서 씻기고 먹이고 입히곤 했다. 아버지는 필화사건에 연루돼 당국에 붙잡혔으며 이를 계기로 KBS로 옮겼다가 49세 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어머니는 결혼 전에 중학교 생물 교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혼하신 후에는 전업주부였다.
--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생계는 어떻게 유지됐나.
▲ 살림살이가 어려웠다. 아버지의 친척뻘 되는 분이 등록금을 대주셨다. 당시에는 아무리 부자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분이 정말로 고마웠다. 다른 한편으로 어린 나이에 그분한테 등록금을 받으러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적절할 때 도움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민망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사람들이 얼마나 발버둥 치는지를 알게 됐다.
-- 고교 졸업 후 바로 대학교에 갔나.
▲ 대학 시험에서 떨어진 데다 등록금도 없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지 않아도 좋은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오기도 작동했다. 나는 서울역 앞 다방 DJ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다.
-- 아르바이트 생활은 평탄했나.
▲ 고졸의 설움이 많았다. 사람들은 "네까짓 게 뭘 안다고", "얼굴 반질반질하게 닦아서 재취 자리나 가라"는 등의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나를 부르는 호칭도 '한비야 씨'가 아닌 '야'였다. 임시 공무원으로 일할 때는 직속 상사가 검은색 장부로 나의 어깨를 내리치기도 했다. 고졸이라는 이유로 임금이 절반밖에 안 됐고 이마저도 떼어먹는 업체가 적지 않았다. 나는 그 돈이 절실히 필요한데,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정호승 시인 |
◇ 시인 정호승(강연과 시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따뜻한 위안을 주고 있다.)
-- 아버지는 어떤 일을 하셨나.
▲ 아버지는 은행원이었다가 40세에 그만두셨다. 아버지는 원래 사업을 하고 싶어 하셨다. 청년 시기에 사진을 좋아해서 사진관 운영을 원했고, 과자 만드는 사업에도 관심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사업을 못 하게 하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한 달 만에 은행을 그만두고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운수업에 뛰어들었다. 아버지 나이 40세 때였는데, 1년 만에 사업이 망했다. 아버지는 그 이후 돈을 벌지 못하셨다. 무슨 협회 같은 곳에서 회계일을 봐주시기도 했는데, 소일거리나 용돈벌이 수준이었다.
-- 아버지가 사업 수완이 없었던 것인가.
▲ 아버지가 70세 정도 돼서 나한테 한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는 유복하게 자라셨고 20세부터 은행에 다니셨기에 돈은 당연히 항상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경제관념이 없었다.
-- 학교 다니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 나는 고등학교 졸업 앨범이 없다. 돈이 없어서 사지 못했다. 고교 2학년 때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다. 어머니께 수학여행이 예정돼 있다는 것을 아예 알리지도 않았다. 그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가 사방으로 다니면서 돈을 빌려야 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수학여행에 갔을 때 나는 학교에 나와서 자율학습을 했다. 졸업한 지 25년 뒤에 친구 사무실에서 졸업앨범을 우연히 봤다. 친구들이 부여로 수학여행을 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 기성회비는 제때 냈나.
▲ 반에서 제일 늦게 냈다. 어머니는 생활비가 없어서 허덕이시기에 나는 기성회비를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교무실에 끌려가 바닥에 꿇어앉아 있으면 지나가는 선생님들이 출석부로 한 번씩 내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곤 했다.
-- 대구에서 기와집에 살았다고 하던데.
▲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기와집을 팔았다. 그 옆 마당에 닭장이 있었는데, 이를 허물고 슬레이트 지붕의 간이 집을 만들어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더는 대구에서 살 수 없었던 부모님은 빚잔치를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친척 집에 머물면서 다른 집에 가서 파출부 일을 하기도 했다. 누나는 독일에 간호사로 나가서 돈을 보내왔다. 형은 군의관으로 월남에 파병 가서 전투수당을 송금했다. 우리 집은 힘들게 살았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재련 변호사 |
◇ 김재련 변호사(박원순 성폭력사건 피해자 법률대리인으로 활동했다. 이주 외국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변론도 많이 했다.)
-- 고향은 어디인가.
▲ 강릉시 사천면 판교리에서 태어났나. 1남 4녀 중 막내였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는데, 농지가 없어서 외가로부터 빌렸다. 부자였던 외가는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것이 안타까웠기에 도와준 듯하다. 나중에는 언니들과 오빠가 객지에 나가 돈을 벌어서 그 땅을 샀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 대학교 3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는 호인 스타일이었다. 술을 즐겨 마셨고, 노는 것을 좋아하셨다. 이런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했다. 어머니는 헌신적으로 농사일을 해서 자식들을 키우고 뒷바라지를 하셨다. 그러면서도 자식한테 신세 한탄을 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사랑을 베푸셨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어머니다.
-- 본인은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줬나.
▲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서 밥하는 법을 배웠다. 논에서 일하는 부모님을 위해 카스텔라 빵을 만들어 가져다드리기도 했다. 태풍에 벼들이 쓰러지면 새벽에 일어나 어머니와 같이 일으켜 세우기도 했다. 아직은 어린 나이였지만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가슴 뿌듯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조명숙 여명학교 교장 |
◇ 조명숙 여명학교 교장(중국지역 두만강 변에서 탈북민을 돕는 활동을 하다 한국에 탈북 청소년을 위한 여명학교를 세웠다. 지금은 이 학교의 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고향은 어디인가.
▲ 서울 노원구 상계동 노원마을에서 4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때 노원마을은 빈민촌이었다. 하루 3끼 먹기가 힘들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철이 없었기에 왜 밥을 안 주느냐면서 엄마한테 대들었던 기억이 난다. 충분히 밥을 먹지 못했던 나는 먹는 것을 지나치게 밝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내 별명이 돼지였다. 지금은 여명학교에서 '미스코리아 교장선생님'이란 별명을 갖고 있다. 당시 상계동 빈민촌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옆집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우리 여섯 식구는 방 하나에 부엌이 달린 작은 집에서 살았다. 몸을 구부리고 자야 했으니 아침에 일어나면 허리가 아팠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인가.
▲ 아버지는 월남전 상이용사였다. 금은세공, 개인택시, 트럭 운전, 옷걸이 장사 등 여러 사업을 하셨으나 실패하셨다. 평소에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아버지는 월남전 트라우마로 술을 마시면 난폭해져서 가족들을 괴롭혔다. 어머니는 막걸리 장사, 공장일, 구멍가게, 아파트 청소 등을 하시면서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 어머니의 막걸릿집 단골손님 중 한 분이 돌아가신 천상병 시인이었다. 어머니가 막걸리를 넉넉하게 드려서 그분이 단골이 됐다.
-- 어머니가 정이 많은 분이었나.
▲ 어머니는 인정이 많았다. 걸인한테 밥을 줘도 찬밥이 아닌 새로 지은 뜨거운 밥을 주셨다. 그래서 걸인들이 우리 집 앞에 줄을 서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한테 "다른 집처럼 우리도 찬밥을 주면 되지, 왜 뜨거운 밥을 주느냐"고 항의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그분들이 우리 집에서라도 대우받아야 하지 않느냐"라고 했다. 어머니가 구멍가게를 할 때는 빵을 공급하는 아주머니, 우편물을 배달하는 우체국 아저씨 등에게 공짜로 밥을 주기도 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치르느라 가게 문을 닫아야 했는데, 이런 분들이 오셔서 가게를 봐줬다. 매일 벌어 먹고살아야 했던 우리 집은 그분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는 이 일로 어머니로부터 정이 있고 따뜻하면서 재미있게 사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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