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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 (월)

“들꽃이 공장 담벼락을 넘었다”…9년만에 출근한 아사히글라스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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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9년 만에 공장으로 출근하는 차헌호 아사히글라스지회장(왼쪽)과 오수일 수석부지회장이 1일 장미꽃 한송이를 들고 공장 정문 앞에서 양손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김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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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에 공장으로 출근하는 아사히글라스지회 조합원들이 동료 노동자들의 축하를 받으며 일터로 향하고 있다. 김현수 기자


“10번의 여름, 9번의 겨울을 보내고서야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다녀오겠습니다.”

1일 오전 8시30분쯤 경북 구미시 구미국가산단에 있는 AGC화인테크노코리아(아사히글라스) 정문 앞에서 우렁찬 출근 인사가 울려 퍼졌다. 취업에 성공한 취준생처럼 “출근 잘하고 오겠다”고 외친 이들은 2015년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된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은 공장 정문으로 이어진 오르막을 오르며 ‘2015년 6월30일’ ‘3321일’이라는 펼침막을 힘차게 밝고 앞으로 나아갔다. 아시히글라스가 도급계약 해지를 통보한 날과 일터로 다시 돌아가는 데 걸린 세월이다.

노동자들은 저마다 붉은색 리본이 달린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공장 정문 앞 관리실에 줄지어 섰다. 공장 관계자는 노동자들의 신분증을 확인한 뒤 핸드폰 카메라에 보안 스티커를 붙이고서 ‘AGC’라고 적힌 출입증을 건넸다.

“아이고, 이게 뭐라고 이래 받기 힘들었노” 임종섭 노조 회계감사가 출입증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9년만의 출근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에서 연대한 노동자들은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박수를 쏟아냈다.

아사히글라스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9년만에 정규직으로 ‘첫 출근’ 했다. 대법원3부가 지난 11일 아사히글라스 하청업체에서 근무하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아사히글라스 노동자로 인정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노동자의 손을 들어주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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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에 공장으로 출근하는 아사히글라스지회 조합원들이 1일 공장 정문 앞에서 장미꽃 한송이와 공장 출입증을 들고 환호하고 있다. 김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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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헌호 금속노조 아사히글라스지회장(51)은 “길거리에서 푹푹 찌는 여름을 10번 보내고 살을 에는 차디찬 겨울을 9번 보내고 나서야 현장으로 돌아간다”며 “참고 또 참고 견딘 9년의 세월을 견디고 첫 출근길을 걷는다.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지난 4월 거리 투쟁을 이어 오다 뇌출혈로 쓰러진 조남달(55) 조합원이 출근길에 오르지 못해서다. 차 지회장은 “조 조합원은 현재 팔다리 마비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병원에 누워있다. 해고되지 않았다면, 9년의 시간이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라고 말하며 동료의 쾌유를 빌었다.

한 조합원의 아내는 직장으로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끝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9년 동안 함께 투쟁하느라 저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일자리 찾기가 힘들었다”며 “아들들이 오늘 아빠가 출근한다고 하니 출근 잘하라며 축하해주더라.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9년전 초·중학생이던 두 아들은 학교 현장·체험학습 등 돈이 드는 행사에 스스로 참석하지 않을 만큼 일찍 철이 들어야 했다.

노동자들은 공장 정문을 넘는 순간 투쟁 2막이 시작된다고 했다. 아사히글라스는 대법원 판결 이후 200명을 구조조정을 한다고 발표했다. 또 판결에 따라 고용관계가 형성됐다며 해고 노동자에게 판결 다음 날인 지난 12일 출근을 명령했다. 출근하지 않으면 결근 처리하고 법적으로 책임을 묻겠다며 엄포도 놨다.

차 지회장은 “회사는 9년을 길거리에 있었던 우리에게 출근하기 위한 준비 시간으로 단 하루도 주지 않았다. 사회적 상식과 통념을 벗어난 행위”라며 “회사는 아직 반성도 사과도 없다. 투쟁 2막도 당당히 승리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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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에 일터로 출근하는 아사히글라스지회 조합원들이 1일 공장 입구에서 한 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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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아사히글라스 정문 앞에는 ‘들꽃의 향기가 바람에 날려 공장 담벼락을 넘는 날’이라는 대형펼침막이 내걸렸다. 해고 노동자들은 자신을 ‘들꽃’이라고 불렀다. 2015년 노조를 만들자마자 문자 한 통으로 해고된 뒤 들꽃처럼 끈질기게 살아내 전국으로 번지는 희망이 되겠다는 다짐에서다.

금속노조 한 관계자는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처럼 길었던 투쟁 속에서 조합원 138명중 22명만 남았지만, 22송이의 들꽃은 철옹성 같았던 회사 정문을 3321일만에 기어코 넘어섰다”고 말했다.

아사히글라스는 2004년 구미4공단에 디스플레이용 유리 제조, 가공 및 판매업을 목적으로 ‘AGC화인테크노코리아’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2009년 사내하청업체 GTS과 도급계약을 맺고 세정과 절단, 이동, 폐기 등 업무를 맡겨 왔다. 그러다 2015년 GTS에 도급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든 지 한달 만이었다.

GTS는 소속 노동자 178명에게 문자메시지로 해고통보하고 폐업했다. 이에 해고노동자 중 23명은 아사히글라스를 상대로 원청사부터 실질적인 지휘·명령을 받는 ‘불법파견’ 관계에 있었다면서, 아사히글라스 소속 노동자임을 확인해달라는 소송을 2017년에 냈고 9년만에 불법파견이 인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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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글라스 사건 쟁점별 요약.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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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기자 kh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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