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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 (월)

국정원과 방심위, ‘친근한 어버이’를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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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친근한 어버이’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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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의 등장인물 소개>





-친근한 어버이: 조선로동당 총비서 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가업을 잇고 있으며 올해 40살이 되었다.



-방심위: 콘텐츠 내용을 심의하는 규제 기관. 누리집 대문에 ‘공정한 방송, 건전한 통신문화’라고 쓰여 있다.





지난 4월 공개된 북한의 최신 선전 가요 ‘친근한 어버이’(2024년)는 이런 노랫말로 시작합니다.



“어머니 그 품처럼 따사로워라/ 아버지 그 품처럼 자애로워라/ 슬하의 천만 자식 한품에 안고/ 정을 다해 보살피시네/ (후렴) 노래하자 김정은 위대하신 령도자/ 자랑하자 김정은 친근한 어버이…”





보다시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찬양·고무하는 노래입니다. 앞서 34년 전에는 선대 수령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찬양하는 ‘친근한 이름’(1990년)이라는 곡이 있었습니다. 우상화 대상만 바뀌었을 뿐 정조나 메시지는 물론 가사 속 표현도 매우 흡사합니다. 일종의 리메이크라고 할 수 있겠죠. 다만 결정적 차이가 있는데, 북한 바깥에서 노래를 받아들이는 방식. 이게 좀 바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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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꾼 참여로 운영되는 한국어 온라인 백과사전 ‘나무위키’의 ‘친근한 이름’(김정일) 항목(위)과 ‘친근한 어버이’(김정은) 항목(아래) 비교. ‘친근한 어버이’의 상위 분류를 보면 ‘인터넷 밈’이라고 쓰여 있다. 사람들이 이 노래를 어떤 맥락에서 수용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나무위키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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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누리꾼에게 ‘친근한 어버이’의 장르는 ‘밈’(meme)에 가깝습니다. ‘웃긴(우스운) 것’이죠. 여기에는 특히 뮤직비디오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군악대부터 ‘조선중앙텔레비죤’의 리춘희 아나운서까지 각계각층 인사가 환히 웃으며 쉼 없이 ‘쌍따봉’을 날리는데, 저도 보면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뭐랄까 컬트적인 매력이 있더군요. 이래서 접속 차단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연재 구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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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근한 어버이’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가운데 양손 엄지를 치켜세운 인물이 리춘희 아나운서.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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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근한 어버이’에 관한 해석 투쟁





한국에서 ‘친근한 어버이’는 차단된 콘텐츠입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는 지난 5월20일 통신심의소위원회에서 ‘친근한 어버이’ 틱톡 영상 29건의 접속을 차단하기로 의결했습니다. 민원인(?)은 국가정보원(국정원)입니다. 민원 요청서에 담긴 국정원의 ‘친근한 어버이’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문 자막이 삽입된 점, 북한 내부가 아닌 외부용 채널에 게시된 점, 김정은을 일방적으로 미화·찬양하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대남 심리전과 연관된 전형적인 국가보안법 위반 정보에 해당한다.’



이북의 선전 당국, 즉 작자의 의도에 충실히 부합하는 관점이죠. ‘북한의 체제를 위해 복무하는 선전물’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그로부터 공작에 대한 경각심을 도출하고 있습니다. 통신소위 위원들도 민원인의 의사를 십분 반영해 접속차단에 힘을 실었습니다.



“김정은이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핵을 쓰고 불바다 운운하면서 적대적 의사를 숨기지 않는, 또 동족을 억압하고 말살하려고 하는 독재자입니다. ‘그런 인물을 찬양하는 게시물을 우리가 그냥 방치해 두는 게 맞느냐’라고 하는 기본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김우석 위원)”



“하나만 덧붙이자면 우리 것도 (북으로) 넘어가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리 거는 (북에서) 다 차단되고 저쪽 것만 (우리한테) 넘어온다는 거는 있을 수가 없죠. 특히 국가 정보기관에서의 요청은 즉시 차단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긴말이 필요 있겠습니까?(허연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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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근한 어버이’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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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통신소위에서 유일하게 ‘해당 없음’ 의견을 낸 윤성옥 위원은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합니다.





-국가보안법 위반에 해당하려면 ‘국가의 존립, 안정과 자유, 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위협하는 공격적인 표현물’이어야 하는데 “노래하자 김정은, 위대한 영도자”가 그 정도인지 모르겠다.



-틱톡에서 영상 29건 차단해도, 다른 계정, 다른 플랫폼(유튜브 등)에는 영상이 그대로 남는다. 일일이 접속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한국방송(KBS), 에스비에스(SBS), 채널에이(A)에서도 ‘친근한 어버이’를 내보냈다. 이 방송사들도 국가보안법 위반인가.



-해당 영상에는 한국어 댓글도 얼마 없었고 그나마도 북한에 대한 조롱, 비난 등 부정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국내에서는 별 관심도 없던 영상을 국정원이 나서서 홍보해준 격이다.





그러면서 윤 위원은 이렇게 결론 맺습니다.



“오늘 29건의 틱톡 영상을 접속 차단한다고 전세계인에게서 ‘친근한 어버이’를 못 듣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세계인이 아는 노래를 우리 국민만 못 듣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폐쇄적인 사회가 된다면 저는 북한 체제와 우리가 다를 바 없다는 측면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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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근한 어버이’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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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심위 ‘국가보안법’ 검열의 역사





사실, 국가보안법 위반 정보·표현물에 대한 민원 심의는 방심위의 주요 업무입니다. 방통위법과 정보통신망법에 따라 국가보안법 위반 정보를 심의하게 되어 있죠.



방심위는 최근 ‘친근한 어버이’ 외에도 북한 가요 ‘단숨에’(3월), 북한 유튜버 ‘유미’(2월) 등에 차단을 의결했고, 작년에는 민주노총 누리집에 게시된 북한에 유일한 노동조합 조선직업총동맹의 연대사를 접속 차단했다가 효력 정지 가처분 재판에서 패소하기도 했습니다.(덕분에 이 게시물은 민주노총 자료실에서 이례적으로 2만 조회 수를 기록하며 흥행했죠)



방심위는 늘 성실했습니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정연주 위원장 시절 방심위가 국정원의 심의 요청을 “번번이 거부”하고 있다며 그 성실성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는데 전체 수치를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미디어오늘이 분석한 ‘연도별 국가보안법 위반 정보 시정요구 추이’를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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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소셜팀 온수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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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문재인이든 박근혜든 큰 차이는 없습니다. “통상 국정원에서 요청한 내역은 거의 다 시정요구 결정을 해왔다”는 것이 방심위의 설명입니다.



국가보안법이 헌법에 규정된 표현의 자유·양심의 자유와 상충한다는 위헌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이런 식의 정보 차단·검열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품는 목소리는 보수 정치인 쪽에서 오히려 힘을 받기도 합니다. 실제로 윤석열 정권은 임기 초 일반 가정에서 티브이(TV)로 ‘조선중앙텔레비죤’을 볼 수 있도록 개방하는 정책을 추진한 적이 있습니다.(결국 좌초됐지만요)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지난 25일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이러한 사정을 짚으며 다음과 같이 발언한 바 있습니다.



“우파적 가치관에서 결국 자유라고 하는 것은, 북한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체제 우위성을 바탕으로, 오히려 개방적이고 정보를 자유롭게 공유하는 것이 우파의 정신에 맞다고 생각한다. 북한의 실상을 공개하면 고무·찬양하거나 추종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동의하지 않는다. 북한 체제의 실상을 보여주면 오히려 우리 국민에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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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크나이트’(2008)의 한 장면. 조커가 배트맨에게 “네가 나를 완성시켜”라고 말하고 있다.




네가 나를 완성시켜





작품이란 작가의 손을 떠나면 수용자를 통해 마저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친근한 어버이’는 영미권 커뮤니티 레딧이나 숏폼 플랫폼 틱톡에서 밈으로 흥한 뒤 국내에 역수입됐습니다. 국정원과 방심위가 역수입에 공헌했고, 이를 접한 한국인들의 반응도 레딧과 비슷했습니다. 거부감을 표출하거나, 웃었죠.



결과적으로 ‘누군가 이 뮤직비디오를 보고 주체사상에 감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북의 선전 당국과 국정원·방심위뿐인 것 같습니다. 물론 밈의 정치적 잠재력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으나, 어쩔 수 없이 국정원과 방심위 덕분에 한국에서 ‘친근한 어버이’라는 작품은 더 특별하게 완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미디어 잔혹사는?



유튜브 댓글부터 저녁 뉴스 날씨예보까지 미디어의 영토는 드넓습니다. 늘 논쟁이 끊이질 않는 영역이지요. 이곳에 익숙하고도 새로운 전선이 들어섰습니다. 언뜻 정치적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일상에 깊이 연루된, 자유에 관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그 투쟁담을 중계해드립니다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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