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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 (월)

의료계 고름 방치하다 별안간 2000명 증원 밀어붙이기…정부 서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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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점에 선 K의료: ①분명해진 의료개혁 지향점]
'과학적 숫자' 2000명, 이해당사자 납득 실패
엄정한 법 집행 원칙 허물고, 후퇴 또 후퇴
의료 공백 장기화에 의대 증원 취지 흔들

편집자주

정부가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와 의대 증원을 발표하며 의료개혁 기치를 올린 지 6개월. 의대 정원이 내년부터 대폭 늘어나 의사 인력 부족 해소의 전기가 마련됐지만, 전공의와 의대생의 이탈로 촉발된 의료공백은 의료체계를 보다 지속가능하도록 개혁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국내외 의료현장 취재와 전문가 자문을 통해 의료개혁 성공 조건과 보완 과제를 점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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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홍(맨 왼쪽)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2월 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 2025학년도부터 의대 정원 2,000명 확대가 결정됐다. 왕태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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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월 제정돼 이듬해 3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보건의료기본법'에는 보건의료에 관한 국가의 책임이 규정됐다. 의사를 포함한 보건의료 자원의 조달 및 관리, 이용 체계 등 보건의료 효율화에 관한 방안 마련도 그 일부다.

정부는 이런 사항들을 종합해 5년마다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수립·시행해야 하지만 지난 23년 동안 계획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만약 법이 정한 대로 계획을 세워서 이행했다면 올해 의과대학 정원 확대와 그로 인한 의정 갈등을 막을 수 있었을까. 결과론이지만 의료계는 정부의 책임 방기를 강조한다. 나백주 좋은공공병원만들기운동본부 정책위원장(을지대 의대 교수)은 24일 "지역별 보건의료자원 등에 대한 기초 조사를 하고서도 인력 조정이나 예산 투입 등이 수반되는 보건의료발전계획은 발표한 적이 없다"며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고, 정부의 실책"이라고 지적했다.

의대 정원이 27년 만에 늘었어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전공의와 의대생, 그로 인한 의료 현장의 혼란은 5개월 넘게 지속되고 있다. 국민적 지지 속에 이룬 의대 증원의 효과보다 이제 의료 공백 장기화를 더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집단행동을 일삼는 의사들 못지않게 과학적 근거를 의심받는 불투명한 증원 인원 결정, 스스로 허문 원칙, 충분히 예상된 반발에도 안이했던 대비책 등 정부에 대한 비판도 갈수록 불어나고 있다.

5년간 매년 2,000명 증원 결정은 난맥상의 핵심이다. 정부는 전문가들의 의사 수 추계 보고서를 토대로 대한의사협회와 28차례 의료현안협의체를 열었고 전문가 및 사회 각계각층과 130차례 넘게 소통한 끝에 나온 숫자라고 설명하지만 의사들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맞선다. 수련병원과 교육 현장에서 이탈한 전공의와 의대생들은 여전히 "2,000명 증원 백지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간 법정 다툼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등에서 2,000명의 근거가 취약하다는 점이 드러난 것도 사실이다. 2,000명은 의대 증원 인원 발표 당일인 지난 2월 6일 오전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에서 정부가 처음 제시한 숫자였다. 올해 5월 공공복리의 중대한 영향을 감안해 전공의와 의대생 등이 낸 의대 증원 집행정지 신청을 각하·기각한 서울고법도 '2,000명에 특별한 근거는 없다'는 취지로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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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텅 빈 대구 경북대 의과대학 강의실에 흰색 가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의대 2,000명 증원에 반발해 학교를 떠난 의대생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대구=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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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명은 불변"이라고 강조하던 정부는 상황이 여의치 않자 내년도 증원 인원을 1,500명으로 줄인 데 이어 "2026학년도 이후 정원은 의료계가 합리적인 단일안을 제시하면 논의하겠다"며 후퇴했다. 전공의에 대한 "기계적 법 적용"도 철회해 복귀자는 물론 행정명령을 따르지 않은 사직자에게도 면죄부를 줬다. 전공의에게 쏟아낸 각종 명령을 스스로 주워 담았고, 전문의 배출 중단을 막기 위해 수련 규정을 바꾸는 등 정책의 일관성과 타당성이 공격받는 상황을 자초했다. "오랜 기간 문제가 누적돼 붕괴 위기인 필수의료와 지역 의료에 대해 그동안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6월 3일 의사 집단행동 중대본 회의)는 자성도 나왔다.

급격한 입장 변화의 이유로는 의료 공백 장기화가 지목된다. 지난달 26일 국회 복지위의 의료계 비상 상황 관련 청문회에서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은 "(의료 공백을) 3, 4주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게 정설이었다"고 말했다가 박주민 복지위원장에게 "굉장히 나이브(naive)하게 예상하고 대비를 했다"고 쓴소리를 들었다.

2월 20일 전공의 집단 이탈로 시작된 의료 공백은 벌써 5개월 넘게 진행 중이다. 지난 26일 접수가 끝난 2025년도 제89회 의사 국가시험에는 대상자 3,200여 명 중 고작 364명만 지원해 내년 신규 의사 배출에 비상등이 켜졌다. 올 하반기 전공의 모집은 오는 31일까지인데, 현재까지 서울의 주요 상급종합병원들도 지원자가 0명일 정도로 외면 받고 있다.

정부는 2035년에 의사 1만 명을 늘리기 위해 의대 증원을 단행했지만 역설적으로 당장 내년부터 전문의 배출이 끊길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사무처장은 "치밀한 시나리오가 없었으니 정부는 전공의 복귀 이후 제시해야 할 유화책을 먼저 꺼내는 악수를 반복했다"며 "의사들이 2020년에 그랬듯 이번에도 강한 저항이 예견됐는데, 정부는 오만에 가까운 비타협적 태도와 강경 대응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꼬집었다.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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