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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8 (목)

[특파원 리포트] 중국서 국적 숨기는 한국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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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최근 중국에서 우리 의류 브랜드들이 ‘신(新) 명품’ 반열에 올랐다. 베이징 시내에선 한국 스트리트 캐주얼 브랜드 ‘MLB’ 로고로 도배된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들이 도처에 보이고, LF의 ‘해지스’는 폴로·라코스테 등과 함께 ‘중국 중년 패션 4대 보배’로 불린다. 한국 기업이 인수해 운영하는 ‘휠라’는 나이키에 버금가는 스포츠 브랜드로 인식돼 618·광군제 등 중국 쇼핑 행사에서 최상위권 매출을 기록한다. 중국 진출 시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최근 3~4년 사이 급격히 인기가 높아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중국 매장 수는 도합 3500곳으로, 한국 맥도날드 매장 수(403곳)의 9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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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베이징 번화가 산리툰의 젠틀몬스터 타이쿠리 스토어(왼쪽). 2022년 오픈한 이곳은 총 3개층, 1340㎡의 규모다. 같은 날 중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잔망 루피' 캐릭터 상품이 베이징 펑황훼이 백화점에 전시돼 있다./베이징=이벌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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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방문한 중국 장쑤성 옌청시의 한 대형 쇼핑몰에 한국 브랜드 '해지스'와 '라코스테'의 매장이 나란히 있다./옌청=이벌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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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사그라들었던 한국 브랜드·제품의 인기가 다시 높아지는 사례들이 관찰되고 있다. 주로 패션, 캐릭터, 게임 등 트렌드와 연관된 산업들이다. 베이징의 투자회사 관계자는 “한국의 서구 감성과 중국 기업의 자본·현지화 전략이 만나면 대박을 친다”고 말한다. 주목할 점은 한국 회사들이 과거와 달리 ‘한국’이란 국적을 마케팅에서 내세우지 않고, 중국 기업과 손잡고 감성·노하우 전달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지스는 중국 기업에 각종 현지화 권한을 넘겨준 이후에야 매장이 크게 늘었고, 휠라는 아예 중국 사업 대리권을 넘겨 매출의 3% 정도만 가져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씁쓸하지만, ‘왕서방의 나라’에서 우리가 돈 버는 새로운 공식은 국적 숨기기다.

왜 중국에서 ‘국적’을 드러내지 못할까. 한국은 중국에게 더 이상 멋진 나라가 아니고, 한중 관계 악화와 비례해서 거부감도 커졌기 때문이다. 최근 만난 120만 팔로어를 거느린 중국의 유명 차량 리뷰 인플루언서 ‘퉁인 브로’는 현대·기아차의 중국 실적이 부진한 이유에 대해 “차는 문제가 없는데, ‘한국’이란 국가 브랜드가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내 계정의 댓글만 봐도 한국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한국 차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했다. 세계 시장에서 양국이 중저가 시장의 라이벌인 것도 한국 견제의 한 이유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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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인스타그램인 '샤오훙수'에서는 한국 베이커리 브랜드가 인기다. 파리바게뜨(오른쪽)는 중국에서 300곳이 넘는 매장을 보유하고 있고, 2021년 산리툰에 매장을 연 한국 브랜드 B&C(버터풀앤크리멀러스)는 인플루언서들의 필수 방문지가 됐다. 중국인들은 이들 브랜드가 유럽에서 건너왔다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샤오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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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시장에서 한국 제품이 선전하는 이유에는 지리적 이점(利點)이 있다. 미국 등 서방과의 대결 구도가 표면화되면서 순(純) 서방 제품을 들여오기 껄끄러워지자, 같은 아시아 문화권이자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이 대체재가 된 것이다. 한국 기업이 ‘서구 감성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셈이다. 코트라 베이징무역관 관계자는 “중국 기업인들은 한국인들의 미적 감각과 트렌드에 대한 이해를 쉽게 얻을 수 없는 자산으로 인식한다”고 분석했다.

쉽지 않겠지만, 이제 한국은 이 징검다리의 지위를 지렛대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전략적으로 국적은 숨기더라도, 중국 파트너사(社)와 판매상으로부터 좀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도록 현명하고 순발력 있는 협상전략을 펼쳐보자. 우리에게는 고급 전략을 펼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수많은 제품과 브랜드가 있다.

[베이징=이벌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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