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07 (월)

팬들이 접어준 수천 마리 종이학… 1980년대 가요계서 날아오른 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나의 현대사 보물] [58] 가수 전영록

데뷔 53주년을 맞은 ‘영원한 오빠’ 전영록(70)은 강원도 정선에 있었다. 정선군 요청으로 지난해 케이블카가 있는 가리왕산에 전영록 기념관을 열었다. 전영록의 본관이 정선이다. 이곳에서 옛 가수들 명곡을 알리는 유튜브 채널도 찍으며 지내고 있다. 얼마 전엔 자신의 노래 가사들을 풀이한 캘리그라피 작시집 ‘인생앓이’를 내고 북콘서트도 이곳에서 가졌다. 그는 “묻혀 있는 좋은 노래와 중·장년 가수들을 남은 인생 동안 최대한 많이 알리는 게 목표”라고 했다.

전시관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검은색 선글라스와 청재킷’이 있었다. 청춘 시절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았던 의상과 소품. “1984년 ‘불티’를 발표하고 입었던 것인데, 정작 방송에선 청소년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준다면서 ‘선글라스 벗어라’ 했죠. 하하.”

조선일보

가수 전영록의 단골 포즈 '쉿'. /전기병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잠자리 안경에 청재킷 대신 가죽 점퍼로 변주하기도 했던 그의 옷차림은 1980년대 청년들의 가슴을 휘저었다. ‘사랑’ ‘TV가이드’ 같은 당시 연예 잡지 표지를 장식했다. “제가 키와 몸집이 작아서 어깨 뽕과 멜빵, 상의 깃 세우는 걸 자주 활용했는데 그마저도 유행이 되더라고요.”

프로스펙스, 나이키, 요넥스 등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전후 브랜드 운동화 유행의 선두에도 그가 있었다. “제가 하도 운동화만 신으니 한번은 (조)용필이 형이 그래요. 넌 왜 높은 걸 안 신어?” 정작 그는 춤추고 뛰기 편하라고 신었는데, 그게 광고가 되어 버린 셈이었다. 전성기 시절 검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던 단골 포즈도 팬들이 하도 노래를 따라 불러서였다. “공연 때마다 팬들이 소리를 질러 조금만 조용히 해달라고, ‘쉿!’ 했던 게 유행이 되었던 것 같아요.”

◇전국의 오빠 부대가 접어 보낸 ‘종이학’

전시관에는 데뷔 초부터 팬들로부터 받은 수천 마리의 종이학들이 놓여 있다. 그의 대표곡 ‘종이학’(1982)의 인기가 수많은 소녀팬과 연인들 사이 일으켰던 종이학 접기 열풍의 흔적. ‘불티’의 물건들과 함께 1970~1980년대 사이 달라진 히트곡 흐름과 전영록의 음악적 색깔 분기점을 잘 보여주는 흔적이기도 하다.

조선일보

1982년 히트곡 ‘종이학’을 듣고 팬들이 접어 보낸 종이학. /전기병 기자


원래는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출발했다. 1972년 기독교방송 ‘영 페스티벌’ 무대에서 곡 ‘나그네 길’로 데뷔할 때도 통기타를 들었고, 양희은, 서유석, 송창식 등 포크 스타들을 키워냈던 명동 음악 클럽 ‘오비스 캐빈’에서도 활약했다. “서유석 선배와 목소리가 닮았다는 평 덕분에 오비스 캐빈 무대 기회를 얻을 수 있었죠.”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1983), ‘그대가 미워요’(1983) 등 그의 초창기 대표곡들에도 서정적인 감성이 짙게 묻어있다.

하지만 1983년 소속사이던 지구레코드와 전속 계약이 만료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포크 스타일의 발라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며 제 음반을 안 내주겠다고 했고, 재계약이 불발됐죠.” 위기는 곧 기회였다. 이듬해 아세아레코드로 둥지를 옮겨 낸 곡이 바로 ‘불티’였다. “본래 가수 나미에게 주려 했지만, 방송국 PD 제안으로 우연히 제가 부르게 된 노래였죠. 처음에는 춤추는 게 꼭 안 맞는 옷 같았어요. 하지만 노래마다 운명의 주인이 있는 법이더군요.”

조선일보

데뷔 53주년을 맞이한 가수 전영록의 "나의 현대사 보물". 전영록 활동 보도한 연예 잡지들. /전기병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돌아이의 소품 모자

그는 직접 시놉시스를 쓰고 주연으로 참여한 액션 영화 ‘돌아이’(1985)에서 썼던 모자도 간직하고 있다. 전영록은 1970년대 하이틴 청춘물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내 마음의 풍차’(1976년) 이후 배우 임예진, 김보연 등과 짝을 이뤘다. 청춘 영화 섭외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액션 영화를 선망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합기도, 당랑권 등을 배우며 브루스 리(이소룡)를 닮고 싶었고, 비슷한 시기 인기를 끈 홍콩 누아르 액션 영화를 보며 우리만의 색을 지닌 액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영화 ‘돌아이’ 촬영 당시 직접 쓴 소품 모자. /전기병 기자


영화 ‘돌아이’의 별칭은 ‘한국판 람보’. 전영록은 “서울 중앙극장에 ‘돌아이’가 걸리던 당시 대각선 방향 허리우드 극장에선 람보를 상영하고 있었다”면서 “관객 수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일명 ‘돌아이 걸’이라 이름 붙인 출연진 여성들과 개봉 후 3일 동안 극장 무대 인사를 돌았다”고 했다. 결국 그해 ‘돌아이’는 한국 영화 지방 흥행 최고 기록을 수립했고, 너무 잘 팔려서 “귀신 붙은 영화”란 영화계 소문까지 돌았다.

◇배우 황해·가수 백설희와 낸 음반 ‘부모님과 함께’

전영록이 부모와 함께 낸 1992년 합동 음반 ‘부모님과 함께’는 ‘전영록의 멀티테이너 DNA’가 담긴 보물이다. 아버지 황해(본명 전홍구·2005년 작고)는 ‘한국의 제임스 캐그니’로 불릴 만큼 수많은 액션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어머니 백설희(2010년 작고)는 노래 ‘봄날은 간다’로 이름을 알린 인기 가수였다. “아빠 따라 배우 해라, 엄마 따라 가수 해라 권유하던 부모님들이셨죠.” 그가 부모 손을 잡고 따라간 길은 1970~1980년대 한국 원로 가수와 배우들의 활동 경로와도 겹쳐있다. 전영록은 “어머니 따라간 국도극장과 스카라극장은 인근에 신카나리아 선생님이 큰 다방(신 카나리아 다방)을 운영해 가수들 사랑방이었고, 아버지 따라간 명보극장은 신영균 선생님이 인수하면서 사실상 배우협회처럼 기능했다”고 추억했다.

조선일보

1992년 아버지 황해, 어머니 백설희와 함께 낸 음반 ‘부모님과 함께’. 실제 녹음 장면을 표지로 썼다. /전기병 기자


◇1980년대 중반 거머쥔 두 개의 빌보드 트로피

전영록이 1982·1983년 MBC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두 차례 거머쥔 빌보드상 트로피는 국내 가요계와 세계 음악 시장이 일찍부터 나눴던 관심과 교류를 엿볼 수 있다. 솔로곡 ‘지나간 시절의 연가’, 윤시내와 함께 부른 ‘연민’으로 각각 트로피를 탔다. 미국 빌보드 본사 발행인이 심사에 참여하면서 생긴 상으로, 직접 내한해서 시상했다. 전영록은 “방송국 DJ로 활동하면서 빌보드 인기 차트 곡과 장르 대다수를 국내에 제일 먼저 소개한 경력도 인정받은 것 같다”고 했다.

조선일보

전영록이 받은 빌보드 트로피 2개와 KBS ,MBC 가수왕 트로피. /전기병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윤수정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