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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 (월)

[단독] 수주 공시하고 번복·철회 빈번… 거래소, 공시 관리 기준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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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매출의 1.5배가 넘는 초대형 공급계약을 공시해 주가가 폭등했다가 1년 뒤 소리 소문 없이 계약 철회 공시를 내 투자자들의 분노를 일으킨 ‘하나기술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한국거래소가 제도 개선에 착수했다.

그간 상장사들이 단일판매·공급계약 체결을 공시한 후 진행 상황을 전혀 알리지 않다가 변경이나 해지 등을 갑자기 발표해 투자자 손실이 빈번히 발생한다는 문제가 제기돼 왔다. 상장사는 비밀 유지를 이유로 계약 파트너를 공개하지 않아도 되는데, 이 때문에 실체없는 기업이라도 양식에 맞는 서류만 작성하면 거짓 매출로 주가 뻥튀기가 가능하다는 지적도 나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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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국거래소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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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거래소는 내부적으로 매출 공시 개선안 초안을 만드는 중이다. 아직 개선안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단일판매·공급 계약 체결 공시에 대한 승인 과정부터 이후 진행 과정, 번복·변경 등에 따른 제재 등을 포괄적으로 개선하는 방안이 담긴 것으로 확인됐다.

거래소는 코스닥시장부터 개선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코스닥 상장사가 대규모 수주 공시로 인해 주가가 더 급변하기 때문이다. 거래소는 코스닥 시장에 대한 단일판매·공급계약 공시를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공시 악용 기업을 막을 수 있도록 개선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또 선의의 상장사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공시 부담을 과도하게 가중하지 않는 선에서 투자자 보호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업계 한 관계자는 “같은 공급계약이어도 계약 기간, 진행 과정이 업종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산업·사업 규모별 등으로 나눠 보고, 코스닥 시장 공시부 실무팀과 공시제도팀이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과정을 거칠 예정인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상장사 공시 담당자 등 시장 참여자들의 입장을 반영한 후 실효성 있는 보완책을 마련해 효율적으로 공시 정보가 시장에 유통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구체적인 개선안 도출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진행 상황 등 계약의 진위 여부를 계속해서 공시하게 하는 개선안은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거래소는 인원 부족 등의 이유로 공시의 양을 대폭 늘리는 대안은 마련하기 어렵다고 토로한 바 있다.

현재 거래소는 유가증권시장 공시부 인원 22명, 코스닥시장 공시부 인원 42명이 근무 중이다. 유가증권시장에는 공시 실무를 전담하는 1~3팀에 10여명이 있고, 코스닥시장은 1~5팀으로 나뉘어 약 30명의 실무자가 공시를 처리한다. 거래소 내 부서 중 규모가 큰 편이긴 하지만, 직원 한 명이 전담하는 상장사의 모든 공시를 처리해야 하므로 업무가 과중하다는 평이 나온다. 한 거래소 관계자는 “공시부는 하루 공시 처리를 위해 공장처럼 돌아간다”고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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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손민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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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원 부족을 핑계로 현 상황을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일반 투자자이기 때문이다. 기업이 주가 조작을 위해 허위로 계약서를 만들어 계약 공시를 하고, 나중에 뒤집어도 이를 막을 수 없어서다.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해 벌점과 제재금을 부과하는 사후 제재가 현재는 최선인 셈이다. 하지만 벌점은 제재금으로 대체할 수 있고, 최근 1년 내 누적벌점 15점 이상이어야 상장 적격성 실질심사 대상에 해당해 무책임한 기업의 공시 뒤집기에 따른 제재 강도가 터무니없이 약하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 2020년 필로시스헬스케어(현 푸른소나무)는 코로나 진단키트와 관련된 대규모 수주 계약을 맺었다는 단일판매·공급계약 공시를 허위로 제출하고, 국내 최초로 코로나19 검체채취 키트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획득했다는 허위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당시 수주 규모는 필로시스 전년 매출액(94억원)의 두 배가 넘었고, 이 과정에서 주가는 6개월간 1070% 이상 급등했다. 현재 관련 공모자들은 약 214억원의 부당이익을 취득한 혐의 등으로 재판 중이다.

이 사건으로 계열사가 2022년 3월 상장 폐지되면서 소액주주들에게 약 1850억원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필로시스는 2022년 감사의견 거절로 거래가 정지됐고 지난해 3월 2020년에 맺은 149억원 규모의 코로나 진단 키트 공급계약의 계약금액과 이행률이 각각 0원, 0%라고 정정 공시했다.

이에 대해 거래소가 내놓은 징계라고는 불성실공시법인 지정과 공시위반 제재금 5400만원, 벌점 13.5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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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월 4일 코로나19 유행 당시 자가진단키트 업체 주가를 조작한 혐의를 받는 의료기기 업체 피에이치씨(현 푸른소나무) 관련자들이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를 위해 서울남부지방법원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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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특정 기업의 수주 잔고가 최근 매출 대비 과도하게 많거나, 계약 한 건의 규모가 최근 매출액 비중을 크게 넘길 경우 계약 이행 과정을 거래소가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계약 형태마다 다를 수 있지만, 상장사가 일정 수준 이상의 수주 계약을 한 시점부터 중간에 이행되는 과정을 거래소에 보고하게 해야 한다”면서 “그래야 투자자들이 중간 계약 상황을 보고 추후 계약이 파기될 수도 있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정아 기자(jenn1871@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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